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가족이 내 날씨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 영화 <남매의 여름밤 >
- 글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가장 많이 짜증을 내는 대상이 가족이야”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 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tvN <아주 사적인 동남아>라는 방송에서 장항준 영화감독이 한 말인데요. 밖에서 잘 모르는 사람에겐 예의 바르게 말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다가 집에만 들어오면 가족에게 부정적 감정을 쉽게 표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그들의 감정에 소홀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죠.
이어서 “가족은 내 사람이라서,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짜증이 나는 거다”라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이 말에 공감했는데요. 저는 아이러니하게 느꼈습니다. 내 사람을 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걸까? ‘가족이니까’라고 답하려면, ‘모든 가족 관계는 서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는데요. 이런 고민을 할 때 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인데요. 남매 옥주(최정운 분)와 동주(박승준 분)는 여름 방학 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빠 병기(양흥주 분)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 이상 기존에 살던 집에서 지낼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 고모 미정(박현영 분)까지 함께하게 되면서 두 남매와 할아버지 영묵(김상동 분), 이렇게 다섯 식구의 여름 나기가 시작되죠.
이 영화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는데요. 다섯 식구는 같은 공간을 거점 삼아 각자의 생활을 꾸려 나갑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이들의 모습을 통해 가족이라는 관계가 변화를 맞이했을 때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보여주죠. 모여 있을 때, 또 각자 흩어져 있을 때, 두세 사람만 모여 있을 때, 모두 다른 태도, 대화, 행동 양식을 나타냅니다.
특히 개인의 삶과 가족 공통의 삶이 구분되어 보이는 지점이 있었는데요. 그 경계선이 흥미로웠습니다. 연애 고민이 많은 중학생 옥주, 갖고 싶은 게 많은 초등학생 동주, 사업이 어려워 생계 고민이 많은 아버지 병기, 남편과의 불화로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고모 미정, 건강 악화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할아버지 영묵. 각자 다른 날씨 속에 사는 겁니다. 그 날씨를 다른 가족들이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개인의 삶은 각자 짊어지는 것
예를 들어, 옥주는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요. 이 아이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가 파는 신발을 몰래 훔쳐 그 아이에게 주고요. 예뻐지기 위해 쌍꺼풀 수술할 돈을 모으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가족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이죠. 옥주의 삶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입니다.
아버지 병기는 살던 집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자신의 아버지, 영묵의 집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 이사 온 것이지만, 아버지한테는 “여름 방학 동안만이라도 여기서 지낼까 해요”라고 거짓말하죠. 짝퉁 신발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데요. 짝퉁이라는 건 가족에겐 비밀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아직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병기의 여동생이자 옥주의 고모인 미정은 남편과 별거 중입니다.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속 시원하게 오빠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죠. 일단 아버지 집에 남편이 찾아오지 못하게 문 앞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지금은 최선입니다.
이처럼 이들에겐 각자의 삶이 있고요. 서로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가족의 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날씨처럼 실제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죠. 해줄 수 없는 것을 해줄 수 있다고 믿고 통제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옥주는 아버지 병기에게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요. 병기는 그 돈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너는 수술 안 해도 예뻐”라는 말로 거절하는 수밖에 없죠. 옥주는 아버지가 파는 신발을 몰래 들고나가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는데요. 짝퉁인 게 들통나 경찰에 잡혀갑니다.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인 겁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것
영화는 가족이란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주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초등생 동주가 나타나 웃음으로 집의 여백을 채워주고요. 심심한 동주를 위해 할아버지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병기, 미정 남매는 동네 슈퍼 앞 평상에서 맥주 한 잔 나누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각자 다른 날씨가 찾아오더라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죠.
무엇보다 다섯 식구의 공통된 날씨가 있는데요. 바로 ‘엄마의 부재’입니다. 어린 옥주와 동주에게도 엄마가 없고요. 어른인 병기와 미정에게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영묵에게도 엄마가 없죠. 엄마가 아닌 사람이 엄마를 대체할 순 없는데요. 이들은 서로에게 부재한 엄마 역할을 상황에 따라 채워주려고 합니다.
옥주는 아버지와 남동생 사이에서 여성의 삶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고모 미정은 그런 조카를 위해 때때로 엄마의 역할을 합니다. 함께 속옷을 널면서 연애 상담을 해주기도 하죠. “옥주야, 너 남자친구 있지? 어릴 때 남자 많이 만나고, 연애도 많이 하는 게 좋아”라고 조언해줍니다. 아버지나 남동생이 채워줄 수 없는 결핍을 고모가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겁니다.
초등학생 동주를 위해 옥주가 엄마 역할을 대체할 때도 있는데요. 동주가 배고프다며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하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 동주의 엄마 역할을 하는 셈이죠. 또, 옥주는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채우기도 합니다. 더위를 타는 할아버지를 위해 선풍기를 틀어주고요. 2층 계단을 내려오다가 홀로 맥주를 마시며 신중현의 ‘미련’이라는 곡을 듣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시간을 지켜주기 위해 계단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결국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인 겁니다. 옥주가 짝퉁 신발을 팔다가 신고 당해 경찰서에 갔을 때 아버지 병기는 딸을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저 짝퉁 신발을 살 뻔한 사람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하죠. 그리고 묵묵히 딸을 태워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 딸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겁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
그러나 이 관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삶을 버티게 해주는 가족 한 명이 사라진 셈입니다. 이 결핍을 남은 가족들이 다시 채우게 되는데요.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인물은 옥주입니다. 옥주는 자신이 만든 모기장 안에 동생 동주를 들이지 않았었는데요. 할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 간 밤, 동생을 안으로 품습니다. 동생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가족 관계는 영원하지 않지만, 남은 가족들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성장하고, 또 서로를 위해 버텨주면서 살아낸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날씨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가족애는 어떤 날씨에도 옆에 있어주는 힘입니다. 이 영화 배경에는 신중현이 만든 ‘미련’이라는 곡이 곳곳에 흘러나오는데요. 우리는 늘 결핍이 생긴 뒤에야 깨닫는다는 걸 내포합니다.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