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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두 얼굴의 간호사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스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지난달 영국 언론을 강타한 것은 ‘루시 렛비’에 관한 뉴스였다. 여기저기 신문에 실린 사진에 따르면, 삼십 대 초반의 신생아 전문 간호사인 렛비는 금발 머리에 친절하고 상냥한 보기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다. 렛비의 사진들은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사진 속 금발 머리는 후일 염색한 것으로 밝혀졌다. 직업이 ‘신생아 전문 간호사’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기를 돌봤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렛비는 본인이 돌보던 아기 일곱 명을 죽이고 여섯 명에게 상해를 입힌 죄로 14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렛비는 가석방이 허가되지 않는 종신형을 받은 네 번째 여성이다. 사형이 폐지된 영국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중형에 해당된다.

렛비가 신생아 특별 보호실의 간호사로 근무하던 2015년 6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카운테스 체스터 병원의 신생아 사망률은 유난히 높았다. 일 년에 평균 한두 건 정도의 예상치 못한 사망이 발생하던 것에 비하여 해당 기간에는 열세 명의 아기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우에 있어 유일한 공통점은 당시 렛비가 근무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렛비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렛비가 야간 근무조에서 주간 근무조로 이동하자, 밤에 벌어지던 사망 사고가 낮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병원 내부조사가 이어지며 2016년 병원은 렛비를 아기를 돌보는 업무에서 제외하고 사무직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수상한 사망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간호사가 자신이 돌보는 아기들을 죽였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조사자들은 병원 전반의 서비스 수준과 리더십을 의심했고, 오히려 렛비는 실무에서 배제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했다.

2017년 3월, 병원은 아기들의 높은 사망률과 관련하여 드디어 경찰에 조사를 의뢰하기로 결정했다. 1년이 넘는 수사 끝에 2018년 7월, 렛비의 1차 체포가 이루어졌으나 곧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경찰 수사는 계속되었다. 2019년 6월, 렛비는 다시 체포되었다가 추가적인 증거 수집을 위해 다시 석방되었다. 결국 렛비는 2020년 11월 8건의 살인과 10건의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되었다.

기소된 내용에 따르면 렛비는 아기들에게 인슐린을 주사하기도 하고 혈액에 공기를 주입하기도 했으며, 다른 아기에게 처방된 우유를 먹이거나 과다한 양의 우유를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렛비는 의료기록을 조작하기도 했다. 기밀로 분류되는 의료기록 한 뭉텅이가 렛비의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렛비는 죽은 아기들의 부모들의 SNS를 검색하기도 했고, 아기의 장례식에 애도 카드를 보내기도 했다.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2

렛비가 작성한 낙서들이 주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사악하다”라거나 “나는 고의로 이들을 죽였다”거나 “도와줘”와 같은 글들을 빽빽이 적은 종이가 여러 장 발견되었는데, 검찰은 이를 범죄를 시인하는 증거로 보았다. 변호사는 업무와 노무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젊은 여성이 절망적으로 적은 낙서라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렛비는 끝내 자백을 하지 않았다. 근 십일 개월의 재판 기간 중에도 흔들리거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렛비가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병원에 같이 근무한 한 의사가 증언을 했을 때였다. 렛비는 부인했지만 이들은 잠시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명확히 알 수 없다. 아기들의 운명을 좌우하면서 마치 신이 된듯한 통제감을 만끽했을 것이라는 의견, 좋아했고 사귀었던 남자 의사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견, 스스로 가족이 없고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 때문이라는 의견, 그저 지루해서 그런 것이라는 의견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형사 재판 선고가 이루어졌지만, 이 사건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항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량을 이유로 한 항소는 현실적으로 성공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이런 사건이 왜 발생하게 된 것이며 유사한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병원 및 관리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등에 대한 길고 지루한 조사 및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한 가지 논의되고 있는 사항은 형량 선고 시 피고인의 출석을 강제하게 하는 것이다. 현재는 선택이고 렛비는 출석하지 않는 쪽을 택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선고되는 순간의 피고인의 얼굴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선고일에 피고인의 출석을 강제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일은 그리 쉽지는 않다고 한다.

왜 죽였는지 알 수 없고 자백도 없으니 렛비의 결백을 믿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재판 기간 내내 법정에 나와 앉아 모든 과정을 지켜본 렛비의 부모는 물론이고, 심지어 여전히 렛비는 결백하며 무능력한 일군의 의사들이 렛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믿는 동료 간호사들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렛비의 친구였던 누군가는 렛비의 오랜 꿈이 간호사였다며 렛비가 스스로 유죄라고 말하기 전에는 자신은 렛비의 무죄를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심지어 렛비의 석방을 촉구하는 단체가 조직될 예정이라고도 한다. 렛비 사건은 집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국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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