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視線)
듣고 또 듣고
- 글 권희경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홈쇼핑 방송을 보는 것이 취미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즐겨보았습니다. 두세 명으로 구성된 쇼호스트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추임새를 넣어가며 열성적인 어조로 상품을 설명하고 칭찬하는 걸 보노라면 그 활기찬 기운이 저한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마음에 전화기를 들어 구입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저는 옷과 먹거리를 자주 샀는데, 실제 물건을 받아 보면 방송에 나왔던 모습이나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묘하게 달랐던 적이 많았습니다. 방송으로 봤을 때는 탐스럽던 과일이 덜 익어서 왔던 적도 있고, 고급 원단을 썼다는 의류는 바느질이 부실해서 실망한 적도 있습니다. 알찬 일정을 자랑하는 해외여행 상품을 구입해서 갔다가 40명 넘는 일행이 하루에 세 군데씩 쇼핑센터를 들른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십 수 번의 실패 끝에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바로 홈쇼핑 방송을 볼 때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을 보라는 것이지요. 과수원에서 갓 따서 신선하다는 말은 덜 익었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고급 원단을 썼다는 옷은 급히 만드느라 마감을 제대로 못했을 수도 있고, 알찬 일정이지만 낮은 가격의 여행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일행이 강제 쇼핑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쇼호스트들은 그러한 단점은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해서 상품의 매력도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기도 하겠거니와, 장점만 소개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할 테니까요.
그렇게 쇼호스트가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난 다음부터는 배송 받은 상품에 대해 덜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시없을 것 같은 역대급 구성이라는 말에도 덜 유혹되니, 집안에 쌓이는 물건이 적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점입니다. 홈쇼핑이라는 미디어에서 쇼호스트로 대표되는 판매자의 생각을 읽고, 제 구매 의사를 결정하고 전달하는 의사소통에서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는 셈이라고 자평해 봅니다.
제가 여러 번의 실수 끝에 터득한 의사소통의 원리를 훨씬 더 일찍 깨달았던지, 현대 경영학의 대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을 듣는 일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경청(傾聽)의 기본이기도 하지요. 경청은 말 그대로 ‘기울여 듣는다’는 것입니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몸, 마음을 모두 상대를 향해 기울이는 것이지요. 경청은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듣고, 둘째,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셋째,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말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에 주의를 기울여야 상대방의 욕구와 의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UCLA 심리학과 명예교수인 ‘앨버트 메러비언(Albert Mehrabian)’은 저서 「침묵의 메시지」에서 말로 전달되지 않는 정보의 중요성을 두 번의 실험을 통해 역설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하려 할 때 말의 의미와 음색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말 자체의 의미보다 음색이 훨씬 중요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면 그 상대방은 이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화로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의 중요성이 82%로 올라가며, ‘말하는 내용’ 그 자체는 겨우 7%의 효과만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음색과 얼굴 표정 등 비언어적 요소의 중요성을 조사했는데, 음색과 표정의 중요성이 2:3 비율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길을 피한다거나 얼굴에 불안감을 보이면 상대방은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언어적 정보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두 실험을 종합해 보니 사람 간의 의사소통에서 언어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고, 청각적 요소는 38%, 시각적 요소는 5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의사소통에서 언어적 정보의 중요성이 낮은 현상을 ‘메러비안 법칙’이라고 부르고, 현대사회의 마케팅, 협상, 설득에 거의 공식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알기에 쇼호스트들은 판매하는 상품과 어울리는 옷차림을 하고 활기차고 명료한 목소리로 상품의 장점을 소개하는 것이겠지요.
의사소통의 기본이 경청이라면, 경청의 목적은 호감을 사기 위한 비언어적 요소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포털 사이트에서 ‘경청’을 검색해 보면 ‘SOLER(Sit, Open, Lean, Eye contact, Relax)’, ‘7:3 규칙(상대방이 70%를 말하게 하라)’, ‘FAMILY(Friendly, Attention, Me too, Interest, Look, You first)’ 등 경청을 위한 구체적 방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잘 듣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기술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살피는 경청은 이러한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진지한 목적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제가 쇼호스트의 판매 기술에 속지 않고 제대로 상품을 파악하기 위한 진지한 목적이 있었을 때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보였듯이요.
언론조정도 의사소통입니다. 신청인과 피신청인 사이에 중재위원이라는 제3자가 더해지는. 그래서 더 역동적이고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복합적 의사소통이지요. 신청인과 피신청인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을 짧은 시간에 모두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귀와 눈과 마음을 기울이면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다 보면 그 의사소통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귀와 눈과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