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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슴 PD의 분쟁현장 르포

금순이와 난민들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PD)
새가슴PD의 분쟁현장 르포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굳세어라 금순아. 이 노래를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70여 년 전 한국전쟁 때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울컥합니다. 어느 날 길 가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답니다. 취재하면서 본 다른 나라들의 금순이들과 금순이를 그리워하는 오빠들을 지금도 만나기 때문입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장소도 다르지만 저는 지금도 흥남부두와 금순이, 그리고 오빠들을 보는 ‘목격자’입니다.

튀르키예 이즈미르 해안의 시리아 난민들에게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서, 리비아 벵가지 해안의 지중해 난민들에게서,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섬 람페두사에서 조각배에 몸을 싣고 가다 배가 뒤집혀 흘러나온 난민 시신들에게서.

저는 그 난민들에게서 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준 6·25 전쟁의 모습과 흥남부두, 금순이와 금순이 오빠들을 봅니다. 마치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6·25 전쟁 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7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쟁터에서의 민간인들은 비슷한 모습입니다. 힘없고 어디 기댈 곳 없는 존재들입니다. 총이나 무기를 든 사람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러집니다. 민간인은 무기가 없으니 당연히 무기 든 사람에게 속수무책입니다. 무기를 든 사람이 염라대왕입니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면 사는 것이죠.

그런 민간인들이 유일하게 무기 든 사람을 피하는 방법은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도망가거나 숨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십중팔구 도망가는 행렬이 생깁니다. 피난민 행렬이죠. 우리도 6·25 전쟁 때 소를 끌고 보따리를 이고, 지고 도망가던 피난민 행렬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폭정을 피해서 만주벌판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난민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시리아 내전에서도 폭격과 폭력을 피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난민 행렬이 많았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은 이웃나라 튀르키예로 도망 가서도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에게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야 비로소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에게해로 가는 바닷가에서 각종 고무보트, 고깃배 등에 몸을 싣고 그리스로 향합니다. 그 과정도 쉽지 않습니다. 돈을 받고 난민들을 배에 태워 에게해를 건너게 해주는 브로커들이 판을 칩니다. 겨우 한두 시간이면 그 바다를 건너는데, 한 사람당 800유로에서 1300유로까지 너무나 비싼 뱃삯을 받습니다. 모든 배가 정원 초과입니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배가 뒤집어져 수장되기 일쑤입니다.

새가슴PD의 분쟁현장 르포 2

튀르키예 이즈미르 해안에서 저는 한 시리아 가족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4인 가족인 그들에게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노란색 스폰지밥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배를 탈 때 짐을 줄이기 위해 배 주인이 그 가방을 버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면서 그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부모는 쩔쩔맵니다. 보다 못한 제가 나서서 “당신도 아이를 키워봤지 않습니까. 저 조그만 가방이 무게가 얼마나 나간다고 못 가지고 가게 합니까. 부디 아이가 들고 가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배 주인은 순간 알 수 없는 미소와 눈빛을 띠며 저에게 “그렇게 저 아이의 가방을 가져가고 싶으면 당신이 대신 한 사람 몫의 뱃삯을 더 내세요. 800유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가장 비열한 웃음을 보았다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800유로를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저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노란 가방을 메고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들이 에게해로 떠나고 저는 바로 이스탄불로 가 비행기를 타고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우리 제작팀이 그 가족을 취재할 예정이었고 저는 되도록 빨리 레스보스 섬으로 가야 했습니다. 비행기 스케줄을 최대한 빨리 잡아 겨우겨우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 가족이 밤새 잘 도착했는지부터 물었습니다. 불행히도 그 가족은 섬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해안가로 달려가 혹시나 구조되지 않았을까 난민들에게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족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닷가를 헤매고 다니다 파란 바닷물 속에 노란 무언가가 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작진 중 한 명이 물에 들어가 그 물건을 건져왔는데, 놀랍게도 그때 그 아이가 그토록 떼를 쓰며 들고 가던 스폰지밥 가방이었습니다. 그 가족은 그날 밤에 선박이 뒤집히는 바람에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가방 속에는 장난감과 자질구레한 짐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물건이 틀림없었습니다. 아이가 그 가방을 그토록 들고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아마도 가족들의 생사를 알려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주 슬픈 마음에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바닷가 한구석에 그 가족의 무덤 대신 노란 가방을 묻어주었습니다. 그 후 취재를 하며 두 달간 몸살 비슷한 증상을 앓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아픈 현장을 모두 제 눈으로 보고 기록할 수 있어 저널리스트로서는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충격이자 비극이었습니다. 한동안 밤마다 악몽을 꾸었습니다. 죽은 생선처럼 바다 위로 둥둥 떠올라 오던 난민의 시신들을 꿈에서도 자꾸 보았습니다.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고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은 수없이 밀려드는 우크라이나 난민들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폴란드로 기차 타고 피난 나온 난민들입니다. 그들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와이파이를 찾느라 난리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이 연결되면 “바바”라고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바바’는 조부모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다리가 안 좋은 고령의 조부모들은 대부분 피난을 못 나옵니다. 그래서 폴란드에 도착하여 인터넷이 연결이 되면 폭격과 총격 속에 남겨진 조부모들의 안위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이 해체되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전쟁의 현장에서, 금순이와 오빠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들이치는 항구와 터미널에서 온몸으로 비극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과 함께 전쟁 비극의 목격자로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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