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범죄보도와 사건의 본질
- 글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체스터는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이백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약 8만 명의 잉글랜드 도시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접경 지역에 있다. 1세기 로마제국 군대의 주둔 장소로 쓰였던 유서 깊은 도시로서, 지역에서 나는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로마 시대의 성벽과 그 부근의 로마 시대 원형 극장, 도심의 큰 성당 등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서로 연결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시내 중심가다. 이 구역은 흰색과 검은색의 튜더 양식 건축물을 포함한 중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흑백 건물들의 틀이 되는 목재는 검은색으로, 벽면은 흰색으로 칠해져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더해준다. 체스터 중심가의 건물들은 1:1.618의 황금비를 가장 잘 구현한 것들이어서 결과적으로 체스터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그닥 놀랍지 않게도 이런 연구를 한 곳은 체스터 대학이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체스터 다음으로 아름다운 도시로는 2위가 베니스, 3위가 런던, 그 다음이 벨파스트, 로마 순이라고 한다.
이런 그럴듯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사실 체스터가 뉴스에 등장할 일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얼마 전 체스터는 영국 전역의 뉴스에 등장했다. 체스터에 거주하는 한 남성이 지역 치안판사로부터 ‘향후 5년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여성들에게 성적인 의도를 담은 대화를 건네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34세의 제이콥 앨러슨은 체스터 시내 중심가에서 가게 종업원들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을 쫓아다녔다고 한다. 체스터 경찰에 따르면 앨러슨은 데이트 신청이나 성적인 의미가 담긴 부적절한 말에 여성들이 “싫다(No)”고 하는 것을 거절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앨러슨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며 여성들을 겁먹게 했는데, 경찰은 이와 관련한 민원을 여러 차례 접수한 끝에 법원에 ‘범죄행동에 관한 명령( Criminal Behaviour Order)’을 발해줄 것을 신청했다.
이 명령에 의해서 앨러슨은 잉글랜드나 웨일스 전역의 공공장소에서 성적인 발언이나 제안을 하는 등 여성들이 괴롭힘이라고 느끼는 행동을 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되고, 여성들에게 스트레스를 줘서도 안 된다. 또한 잉글랜드 및 웨일스 내에 있는 여성들에게 데이트를 하자거나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하는 경우 그 여성을 접촉하거나 대화를 하는 일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앨러슨은 체스터 지역의 스포츠 센터 시설 및 몇몇 가게들과 시내 중심가의 프랜차이즈 카페 세 군데에서 출입을 금지당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어떤 장소든 구두나 문자로 출입을 금지당하는 경우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되며, 직원이나 안전요원으로부터 나가달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해당 영업장에 머무를 수도 없다.
앨러슨이 받은 이 명령은 개인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한 다른 모든 조치들을 취해보고 난 후에야 내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앨러슨은 그간 체스터 지역에서 꽤나 말썽을 부렸던 모양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앨러슨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그때는 실형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BBC를 비롯해 스코틀랜드의 지역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 한창 나이의 남자가 오 년 간이나 여성들에게 데이트 신청도 못하고 말도 못 걸게 되었다니, 그건 특이하고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대체 앨러슨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더 상세한 내용을 찾아봤으나 찾지 못했다. 특히 앨러슨의 개인적인 배경은 어떠하며 그가 문제된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 범죄를 다루는 뉴스에는 당사자의 실명 및 초상은 물론 고향과 인적사항 및 기타 성장과정까지 불필요할 정도로 상세히 보도되는 것이 영국식 보도의 특성이라면 특성인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앨러슨을 동정하는 논조의 기사도 없었다.
약간 궁금해 하다가, 앨러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여성들을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면서 원하지 않는 언행을 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써주거나 그걸 읽으면서 무의식중에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려는 노력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일일이 보도한다면 그 행동에 비해 해당 명령이 과했는지 아닌지 개인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정도 언행은 받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여성들에게 비난을 전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두려움에 시달릴 걱정 없이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었어야 한다는 것인데 논점이 흐려지는 것이다.
체스터 경찰은 앨러슨에게 내려진 명령과 관하여, 주안점은 여성들을 보호하고 체스터를 모두가 살기에 안전하고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런 이유로 앨러슨에게 해당 명령이 발해지는 것을 바랐고 이 명령으로 인해 여성들이 더욱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경찰은 앨러슨이 명령을 어기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미러 온라인>에 따르면 체스터 경찰은 그가 인접한 웨일스로 건너가 같은 짓을 하는 것 역시 막게 해달라고 미리 요청했다고 한다. 체스터가 정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체스터 경찰의 일처리는 매우 꼼꼼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