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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존중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영국의 공식 국가명을 한국어로 옮겨 보자면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United Kingdom, UK)’ 정도 된다. 그레이트 브리튼이 우리가 아는 토끼 모양의 섬 이름이고, 북아일랜드는 토끼의 왼쪽 허리 앞부분 정도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의 북쪽 약 1/3 부분을 차지한다.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 있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각 나라(country)와 아일랜드 섬의 북아일랜드가 연합하여 국왕 아래 모여 있는 나라가 영국인 것이다. 이 각 나라에는 각자의 의회가 있고 각자의 정부가 있다. 물론 이들 의회 및 정부는 영국 의회 및 정부로 통합된다. 다만 잉글랜드 의회는 따로 없고, 영국 의회가 곧 잉글랜드 의회다. 잉글랜드가 이 연합 왕국의 종주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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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은 각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들을 합쳐 만들어진 것이다. 유니언 잭의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십자가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를 상징한다. 흰색의 X자 모양은 솔타이어(saltire), 즉 X자형 십자가로서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를 상징한다. 그리고 붉은 색의 솔타이어가 상징하는 것은 북아일랜드의 성 패트릭이다. 다만 웨일스의 수호성인인 성 데이비드를 나타내는 문양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웨일스가 너무 일찍 잉글랜드에 합병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웨일스 사람들로서는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웨일스는 세 나라 중 가장 먼저 잉글랜드에 합병되었다. 웨일스의 정체성은 일찍이 로마가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5세기부터 시작되어 11세기에 공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 웨일스 공국은 200년에 걸친 전쟁 끝에 1283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정복당한다. 15세기에 잉글랜드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잠시 독립을 쟁취한 시기가 있었으나, 16세기에는 완전히 잉글랜드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웨일스에도 민족주의가 발현했다. 웨일스 민족주의 정당이 1925년에 생겨났고, 1962년에는 ‘웨일스 언어학회(The Welsh Language Society, 웨일스어 표기로는 Cymdeithas yr Iaith Gymraeg)’가 생겼다. 1967년에는 ‘웨일스 언어법(Welsh Language Act 1967)’이 제정되어 웨일스 지역에서는 웨일스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웨일스 언어학회는 영어로만 표기된 도로표지판 등을 훼손하는 등의 과격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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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잉글랜드와 한 나라로 여겨졌는데도 어떻게 정체성이 살아있는지 의문이 들 법하지만, 사실은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민족 자체가 다르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앵글로-색슨족 혈통으로, 웨일스 사람들은 켈트족의 후손인 것으로 본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언어마저 다르다. 영어로는 웨일스어를 웰시(Welsh)라고 적지만 웨일스어로는 크므라이그(Cymraeg)라고 하는데, 사투리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와는 상당히 다른 언어다. 물론 이제는 웨일스에서도 웨일스어만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웨일스어와 영어를 병행해서 쓴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웨일스어를 외국어 가르치듯이 따로 가르친다.

이렇게 웨일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한 웨일스 기초자치단체 의원이 웨일스어로 적힌 이메일을 받고 독일어로 답장을 보냈다가 징계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12월 ‘루이스 휴스’는 웨일스 언어학회 회원인 ‘하워드 휴’로부터 웨일스어로 된 이메일을 받았다. 휴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어는 잘했지만 웨일스어는 전혀 몰랐다. 휴스는 휴의 이메일에 독일어로 답장을 했다. 휴가 다음해 2월 다시 웨일스어로 이메일을 보내자, 휴스는 이번에도 독일어로 회신을 했다.

이와 같은 휴스의 반응이 모욕적이라고 느낀 휴는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웨일스 고충처리위원회는 휴스의 행동이 휴의 웨일스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웨일스 언어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휴스가 평등 및 존중의 원칙을 어겼고 의회에 불명예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휴스는 1개월 정직에 더해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메일을 보낸 휴에게 3주 내에 사과 편지를 보내라는 처분을 받았다.

휴스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한 일이었을 뿐이고, 전혀 읽을 수 없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자신이 느낀 어려움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지 휴에게 모욕을 줄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농담 비슷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휴는 기초자치단체 의원이 이메일을 받는 행위는 공식적인 것이며 공직에 있는 사람은 그에 맞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류에 속해 있는 사람은 비록 가볍게 하는 행동일지라도 억압과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소수자 그룹에게는 예민한 문제일 수 있다는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 사건에 대해 보도한 ‘잉글리시’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메일> 기사의 논조는 ‘English’만을 말할 수 있는 휴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웨일스 신문들의 논조는 매우 다를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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