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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타인 만족보다 자기만족
- 영화 <블루 재스민>

  •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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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필자 제공

며칠 전,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서로 근황을 물었습니다. 최근 관심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저는 식단, 운동, 금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세 가지를 통해서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금주는 특히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술자리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 자극적인 음식과 알코올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을 덜 쓰게 되어 소비 습관도 건강해진다고 강조했죠.

그러자 한 동료가 말했습니다. “술을 안 마시면 사회생활 어떻게 해요? 사람들 안 만나요?”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술 안 마셔도 다 만날 수 있어요”라고 답했는데요. 그 동료는 “그들은 기자님이 술 마시길 바랄 수 있잖아요?”라고 재차 물었죠. 저는 이 질문이 참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옆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동료는 저를 향해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기자님은 자기만족에 사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마치 비꼬는 것 같은 말투였는데요.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칭찬처럼 들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만족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자기만족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면, 만족감에 관한 기준이 자신에게 있을 때 가능한 일이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겁니다. 그런데 왜 ‘자기만족’이라는 단어가 비꼬는 말로 쓰였을까요? 그때 저는 영화 <블루 재스민>이 떠올랐습니다.

<블루 재스민> 줄거리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주인공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은 부유한 사업가 ‘할(알렉 볼드윈 분)’과 결혼했지만, 할의 외도를 알게 된 뒤 이혼합니다. 할과의 이혼 이후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는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 분)’를 찾아가는데요. 화려한 뉴욕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며 좌절하던 재스민은 근사한 외교관 ‘드와이트(피터 사스가드 분)’를 만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희망을 품습니다.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재스민이 ‘자기만족’이 아닌 ‘타인 만족’을 위해 사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대조법를 통해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는데요. 공간부터 차이가 납니다. 한 곳은 재스민이 기존에 살던 뉴욕, 뉴욕 안에서도 롱 아일랜드 햄튼이라는 최고의 부촌입니다. 유명인과 부유층이 사는 주택이 즐비한 곳이라 미디어에서는 선망과 질시의 대상으로 묘사하기도 하죠. 다른 한 곳은 재스민이 이혼 후 경제력이 없어진 상태에서 살게 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부유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동네인 차이나타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대조를 플래시백 기법(현재 시제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과거 장면을 이야기 중간에 넣는 방식)을 통해 보여 줍니다. 재스민의 과거가 처음부터 나오지는 않고요. 재스민의 심리 상태에 따라, 상황에 따라 회상하는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진저의 집에 처음 들어가는 장면에서 재스민은 그 집이 형편없다고 느끼는데요. 이때 과거 재스민이 남편 할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재스민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현재 상황이 얼마나 초라한지 플래시백을 통해 즉각적으로 드러내죠.

이야기를 설명하는 플래시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재스민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감정 플래시백’인 셈이죠. 공간의 대조와 심리적 대조를 이야기가 흘러가는 내내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재스민의 허영심입니다. ‘타인 만족’이죠. 재스민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에 집착하는데요. 첫 장면부터 그 성격이 드러납니다. 경제적인 부분이 무너져 여동생 집으로 가는 사람이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빈털터리 신세인데도 항상 샤넬 트위드 자켓을 입고 다닙니다. 화려하던 시절에 입던 옷, 행동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현실에선 초라한 환경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셈이죠. 일종의 계급 적인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또 ‘에르메스 핸드백’을 늘 들고 다니는데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가방은 배경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삶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놓을 수 없는 허영을 상징하죠. 새롭게 만난 외교관 드와이트에게 자연스럽게 전 남편 할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새 남자에게 자기 스스로를 포장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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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건 그녀의 이름인데요. 원래 이름은 ‘재닛’인데, 스스로 ‘재스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타인의 눈에 재닛이 별로이기 때문입니다. 멋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양부모 밑에서 자란 ‘재닛’이 아닌 상류층에 어울릴 만한 ‘재스민’으로 살려는 겁니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 남편 할은 그걸 알아봐 준 사람이었고요. 새롭게 만난 외교관 드와이트도 ‘재닛’이 아닌 ‘재스민’의 ‘타인 만족’을 채워줄 남자였습니다. 재스민은 할의 집에 갔을 때 “환상적이다”라고 말했는데요. 드와이트의 집에 갔을 때도 같은 말을 합니다. 두 남자는 재스민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도구적 인물들인 겁니다.

재스민의 여동생 진저는 조금 다릅니다. 진저는 ‘칠리’라는 남들 보여주기에 멋지지 않은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파티에서 ‘알’이라는 남자를 만나는데요. 사운드 엔지니어이고 로맨틱한 말을 잘하는 남자입니다. 진저는 자신 또한 언니처럼 그럴 듯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환상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유부남이었죠. 이에 진저는 다시 칠리에게 돌아갑니다. 재스민과 가장 큰 차이가 이 지점입니다. 진저는 환상에 잠시 빠지더라도 현실로 돌아와 자기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 겁니다. 언니가 별 볼 일 없다고 비난하는 남자이더라도 나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한 거죠.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작품들이 떠오르는데요. 2022년 쿠팡플레이가 선보인 <안나> 역시 타인의 삶을 좇는 이야기죠. 하지만, 일반적인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이야기와 달리 <블루 재스민>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재스민의 ‘타인 만족’ 그 자체가 아니고요. 그것이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일과 감정입니다. 영화 말미에는 재스민의 ‘에르메스 가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명품과 환상이 사라진 상태의 재스민은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입니다. 명품을 가져본 적 없는 여동생과 주변 인물들보다 더 밑바닥으로 주저앉은 사람처럼 느껴지죠.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이 연기한 재스민에 대해 “그녀는 중심이 없어요. 그게 그녀를 추락하게 한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배우의 말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맡긴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재스민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인 겁니다. 삶의 모든 게 무너진 재스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모두 맡겼지만, 주변 사람이 전부 떠났기 때문에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중심이 없는 삶의 끝이 혼잣말,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라는 걸 냉정하게 보여주죠.

다시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재스민을 떠올리며 ‘자기만족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봤는데요. 비꼬는 듯한 말이 칭찬처럼 들렸던 이유는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지 않고, 운동을 하는 것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겁니다. 특히 동료가 걱정했던 ‘금주’는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응원을 받았죠. 재스민은 혼잣말로 끝났지만, 여동생 진저 주변에는 여전히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 같은 장면이 타인 만족보다 자기만족을 추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