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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랜드‘로드(Lord)’의 갑질과 차별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영국에는 한국과 같은 전세 제도는 없다. 월세에 해당하는 임대차 방식이 있을 뿐인데, 주택임대차 계약 관계에서 임대인, 즉 집주인을 일반적으로 랜드로드(landlord)라고 한다. ‘Land(땅)’의 ‘Lord(군주, 영주, 심지어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도 ’lord’라고 한다)’인 셈이니 매우 거창한 이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에 사는 한국인들끼리 농담 삼아 “영국의 랜드로드는 진짜 ‘Lord’라서 랜드로드라고 부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집주인이 마치 영주처럼 마음대로 굴 수 있다는, 즉 그만큼 임대인과 세입자 관계에서 임대인의 입지가 강하다는 의미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집주인이 진정 ‘갑’이라는 소리인 셈인데, 집주인 ‘갑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제21조 통지(Section 21 notice)’를 들 수 있다. ‘잘못이 없어도 쫓아내기(no-fault eviction)’라고도 불리는 이 통지에 의해 임대인은 세입자에게 그저 집을 비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퇴거를 위한 최소 유예기간은 단지 2개월에 불과하다. 주택 관련 자선단체인 ‘쉘터(Shelter)’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에 저 통지를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난 세입자는 약 이십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따져보자면 약 7분마다 한 통씩 통지서가 발부되었다는 것이다.

임대인 측이 이 통지를 보낼 때 세입자 측에 왜 나가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기는 하지만, 이 통지를 보내게 되는 주된 이유는 월세가 밀렸거나 임대인이 해당 부동산을 팔고 싶거나 더 높은 월세를 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입자가 셋집을 수리해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보복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집주인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세입자를 간편하게 내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최근 이와 관련하여 회자되는 사건이 있다. 아이가 넷이 딸린 33세의 ‘렉시 레븐스’는 크리스마스 전날 집주인으로부터 ‘제21조 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새로 세 들어갈 집을 찾던 레븐스와 그 남편은 “아이가 넷이나 되기 때문에 집을 빌려줄 수 없다”는 말을 연달아 들었다. 레븐스는 NHS(국영의료서비스) 소속의 신생아 전문 간호사이고 부부의 경제상황은 집세를 내기에 충분하다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이들에게 집을 빌려주겠다는 임대인이나 부동산 중개업소는 없었다. 결국 이 가족은 자신들을 홈리스(homeless)로 등록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돈이 있은들 소용이 없다. 빌릴 수 있는 집이 없으니. 오로지 애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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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충격을 받은 레븐스는 쉘터의 도움을 받아 ‘부동산 옴부즈만’에 이 사건을 제소했다. 부동산 옴부즈만이란 법원을 대신해서 소비자와 부동산 중개업소 간의 분쟁을 조정해 주는 기관이다. 결국 부동산 옴부즈만은 레븐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더 나아가 정당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고 단지 아이가 있다거나 많다는 이유만으로 부동산 임대를 거절하는 것은 차별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행이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차별했다고 보았다기보다, 아이를 데리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더 많은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 판정으로 인해서 앞으로 영국의 부동산 중개업소들은 아이가 있다거나 많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임차인을 걸러낼 수는 없게 되었다. 아무리 집주인들이 그런 요청을 한다한들 그 요청에 따르면 안 된다. 자칫하면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다. 만일 아이를 이유로 임대를 거절하고 싶다면 타당한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방의 개수가 아이 수에 비하여 적다거나(아이 수와 성별에 따라 방 개수에 최소 기준이 있다) 주택 구조가 어린 아이를 둔 가족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하는 이유를 댈 수는 있을 것이다. 쉘터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잉글랜드에서 부모 다섯 중 하나(19%), 즉 삼 만 가구 정도가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하는 집을 빌릴 수 없었다고 하니, 이 조치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 이 사태의 원인이 되었던 저 ‘잘못이 없어도 쫓아내기’ 통지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사실 영국 정부는 이미 전전 총리 시절인 2019년도에 ‘제21조 통지’를 금지시키고, 아이가 있다거나 보조금을 수령하고 있다는 등의 기타 이유로 임대차 계약을 거부하는 등의 차별적인 행위를 못하게 하는 한편, 임대인 측의 집수리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임대인 개혁 법안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이 법안의 시행이 뒤로 밀리고 있을 뿐이다. 레븐스 사건을 계기로 저 잠들어 있는 법안을 조속히 시행에 옮기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기는 하다.

다만 이 이야기를 적고 있노라니 한국의 집‘주인’이 영국의 랜드‘로드’보다 과연 갑질을 덜 하고 덜 차별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심지어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월세를 더 많이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다. 한편, 영국의 랜드로드들은 “요즘은 세입자가 상전이다”라는 식의 말들을 종종한다. 이는 한국 집주인들도 하는 소리인 것으로 안다. 다들 자기 선 자리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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