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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視線)

사과는 힘이 세다

  • 권희경 (경남중재위원/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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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박사 과정을 공부하러 미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요즘은 한미 운전면허 상호인정 협정이 체결되어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으면 따로 시험을 치지 않고도 미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는 것이 번거롭기는 해도 가능은 하지만, 그 때는 필기시험부터 모두 새로 치러야 했습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실기 시험을 준비할 때, 한국 유학생들은 대개 한국 유학생 선배들로부터 운전을 배웠습니다. 그 때 가장 먼저 들은 말은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절대 ‘I am sorry’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사고 책임을 덤터기 쓸 수도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대신, 상대에게 “Are you okay?”라고 물어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바로 신고를 하라고 조언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사과나 동정의 뜻으로 ‘미안하다(I am sorry)’고 한 말이 법정에서는 잘못을 인정한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가 있어 가정에서도 함부로 사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가 한국에까지 전해져서인지 요즘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교통사고뿐 아니라 다른 분쟁 상황에서도 당사자들이 사과하는 경우가 드물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정 장소에서 만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목소리가 커지고, 서로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하기도 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치고도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보험회사에 연락만 하는 운전자도 보았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아 오보를 내고도 사과 없이 “반론보도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기자도 있었고,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 소송을 제기하면서도 “배우자와 맞지 않아 같이 살 수가 없다”라고만 할 뿐 미안한 기색도 비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 아무리 중재를 하려고 노력해도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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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미국에서는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미리 사과하면 갈등이 더 쉽게 풀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1994년 의료사고 소송을 낸 환자 가족 중 37%는 “충분한 설명을 듣고 사과를 받았다면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의료진의 사과를 책임 인정 증거로 삼지 못하게 하는 주도 늘고 있습니다. 미국의 40개 주는 1999년부터 이른바 ‘사과법(apology law)’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환자에 대한 의료진의 사과가 의료소송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즉, 의료 사고로 인한 소송 시 의료진이 표명한 사과나 그에 준하는 여러 표현들이 소송에서 증거로 활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 측의 환자에 대한 사과를 장려하고 의료소송을 줄여 의료진과 환자의 화해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이 사과법의 효과를 분석한 결과, 사과법 자체는 소송을 줄이고 화해를 촉진하는 효과는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병원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사과 프로그램은 의료 소송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미시간대병원이 의료사고에 대한 사과프로그램을 시행한 후 환자 측의 보상청구가 1/3 감소했고, 소송 건수는 2/3 감소했습니다. 병원이 보상을 한 사례에서는 보상 금액이 60% 감소했고, 소송으로 이어진 경우 배상 금액이 45% 감소했습니다. 법적 다툼의 기간도 평균 20개월에서 8개월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즉, ‘법대로’ 보다는 ‘법보다 앞선’ 진정 어린 사과가 힘을 발휘한 것이지요.

<쿨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공저)>라는 책에서는 사과의 또 다른 힘을 보여줍니다.

“40년 경력의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병원 의사인 다스 굽타는 2006년 최대 위기를 맞는다. 환자의 아홉 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내야 할 조직을 여덟 번째 갈비뼈에서 떼어낸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는 두 번 생각 하지 않고 환자의 가족을 찾아갔다. ‘저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환자분께 큰 해를 끼쳤습니다.’ 환자의 가족은 굽타를 고소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에 게재되면서 전말이 알려진다.” - 책 <쿨하게 사과하라> 中

십여 년 전 처음 방문했던 창원 성산구의 좁은 지하 주차장에서 빈자리 찾는 데만 집중하다가 그만 앞차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 잘못이 명백했기에 바로 내려서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드렸습니다. 먼저 사과를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건물이 처음인데 약속 시간에 늦어 급한 마음에 앞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차 운전자는 내려서 뒷 범퍼를 확인하고는 “손상 없으니 그냥 가세요”하고 제 연락처를 묻지도, 보험 처리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 그분이 여성이었다는 것 말고는 얼굴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분이 했던 말은 잊히지 않습니다. 사과는 분명 책임을 인정하는 언행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가 꼭 덤터기로 돌아오지는 않았던 경험은 다들 해보셨을 것입니다. 또, 끝내 사과하지 않아 용서받지 못하고 법적인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셨을 것입니다.

실수나 잘못을 범했을 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사과를 주저하는 이유를 <쿨하게 사과하라>의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직책이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권위가 있을수록 사과에 인색한 이유는, 사과하는 동시에 권위를 잃거나 책임감이 더 막중해진다는 기억이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것이지요.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거짓말과 변명만 늘어간다고 봅니다. 권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불필요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사과를 주저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가족, 직장뿐 아니라 갈등 상황에서도 사과는 그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언론중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피신청인 언론사가 진심으로 사과했을 때 신청인이 조정안을 더 잘 수용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진정한 사과는 힘이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