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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가스요금과 백만 원짜리 슬리퍼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아기 돼지 삼 형제’라는 동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을 하기로 결정한 아기 돼지 삼 형제가 각자 집을 짓는다. 첫째가 지은 집은 짚으로 된 것이어서 못된 늑대가 입김을 불자 날아가 버린다. 둘째 돼지는 나무로 집을 지었는데, 늑대는 둘째의 집을 불질러 버린다. 셋째 돼지는 벽돌로 집을 짓느라 더 고생스러웠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그렇게 지은 집은 늑대가 입김을 불어도 끄떡없고, 불에도 타지 않았다. 그렇게 아기 돼지 삼 형제는 막내의 집에 모여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그런데 이 동화의 기원이 영국 민담이라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인쇄되어 나온 건 1840년대라지만, 구전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 다트무어 지역에서 시작된 이 민담에서 애초 등장인물은 픽시(pixie, pigsie나 puggsy라고도 쓰는데, 요정 같은 작은 상상 속의 존재다)와 여우였다고 한다.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돼지들(pigs)과 늑대 간의 일로 바뀌게 된 경위야 알 수가 없으나, 여기에 등장하는 벽돌집은 여전히 영국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주택이다. 다만 영국식 벽돌집은 늑대의 침입은 막았을지언정 새어드는 바람은 막아내지 못한다.

영국의 집들은 대개 한국 가정집에 비하여 추운 경우가 많다. 지을 때 단열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이는 영국의 겨울 추위가 혹독하지 않기 때문인 듯도 하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인들은 겨울에는 춥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영국인들이 집안에서도 두툼한 실내화에 옷을 다 갖춰 입고 스웨터나 심지어 외투까지 덧입고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집을 덥게 하기보다는 옷을 껴입는 쪽을 선택한다. 보일러는 하루에 한 차례나 두 차례 잠깐 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센트럴 히팅, 한국으로 치면 ‘보일러’가 없는 집도 있다. 영국인 지인 중 하나는 센트럴 히팅이 없는 집에 살았는데, 너무 추워지면 세탁 후 건조기를 돌리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건조기의 열기로 집이 따뜻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좀 심한 경우지만 말이다.

이렇게 추위를 당연히 여기고 대범히 맞서는 영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올겨울에는 보일러나 난방기를 틀지 않고 버티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겨울, 즉 2022년에서 2023년에 걸쳐 있는 겨울은 영국 날씨로서는 이례적일만큼 추웠다. 2022년 12월은 평년에 비해 가장 기온이 낮았던 달이라고 한다. 이는 북극의 찬 공기가 영국으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라는데, 기후 변화로 인해 여름은 점차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2

문제는 이런 와중에 가스 및 전기요금이 어마무시하게 올랐다는 것이다. 전기요금은 작년 1월 대비 66.7%, 가스요금은 129.4% 인상되었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길어 영국의 가스 저장량이 줄어든 반면, 영국 내 에너지 생산에는 차질이 생기고 외국으로부터의 공급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적어진 것이 원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무래도 한 몫을 했다. 이런 지경이니, 최근 한 통계조사에서는 성인 10명 중 8명은 치솟는 가스 및 전기요금 때문에 생활비가 훨씬 많이 든다고 답했다. 하지만 평균 임금인상률은 6% 남짓이다. 같은 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수치가 집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고 답했고, 비슷한 수치가 가스 및 전기요금 고지서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10명 중 6명이 가스 및 전기요금 인상 때문에 연료를 덜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는데, 영국 정부는 한술 더 떠서 집의 보일러 설정 온도를 낮출 것을 권고했다. 더 춥게 지내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의미다. 이런 지경이니 얼마 전 보일러를 점검하고 수리하러 온 ‘브리티시 가스(영국의 대표적인 에너지 기업이다)’의 기술자는 우리 집의 온도가 지나치게 높다며 설정 온도를 더 낮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스비 폭탄을 맞을 거라면서 걱정부터 당부까지 줄줄이 늘어놓고 갔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그리 따뜻하게 해놓고 사는 것도 아닌데.

2월 초 영국에서는 브리티시 가스와 계약한 수금 업체 직원이 가스 요금을 제대로 내지 못한 집에 열쇠공을 동원해 문을 따고 들어가 요금 미납 시 가스 공급이 끊기도록 하는 미터기를 설치하고 있다는 ‘더 타임즈(The Times)’의 폭로가 있었다. 어린 아이나 장애인이 있는 취약계층 가정에 대해서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브리티시 가스 측은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연료비가 계속 상승하고 연료비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구가 점점 많아진다면 단순히 기업이 요금 지불을 유예해주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대부분의 국민이 생활비 인상으로 고심하는 가운데, 총리인 리시 수낵(Rishi Sunak)의 부인은 아이들을 등교시키면서 가격이 약 100만 원 정도인 슬리퍼를 신어 구설수에 올랐다. 총리 부부의 재산은 약 1조 1900억 원에 달한다. 부인 쪽 재산이 더 많다. 100만 원이 이들에게 큰 액수일 리는 없지만 이 겨울 서민들의 입장은 매우 다르다. 부자 정치인의 더 부자 아내가 신은 슬리퍼 가격에까지도 시비를 걸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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