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視線)
마음을 위로하되,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게 하라
- 글 권희경 (경남중재위원/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감정은 수용하되 행동에는 한계를 지어주라.”
‘감정코칭’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쯤 들어 보셨거나 이미 익숙한 원칙일 것입니다. 감정코칭은 아동 심리학자, 심리치료사이자 교육자였던 하임 기너트(Haim Ginott, 1922-1973) 박사가 자신이 경험한 교육 현장의 임상 사례들을 통해 얻은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뉴욕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제 청소년들’을 상담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가출을 하는 등 문제행동을 보였을 때, 그 행동을 교정하려고 하기보다 아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자 아이들이 굉장히 호의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상담사에게 유대감과 신뢰를 느끼면서 행동이 교정됐던 것이지요.
그런 임상경험을 통해 하임 기너트 박사는 “아이의 기분이나 감정을 무시하지 마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임상사례를 바탕으로 알게 된 사실을 「부모와 아이 사이(Between Parent and Child)」, 「부모와 십대 사이(Between Parent and Teenager)」, 「교사와 학생 사이(Teacher and Child)」라는 3부작의 책으로 펴냈습니다. 아동과 청소년을 지도하기 위한 대화법의 몇 가지 대표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절대로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은 행동이지 아이가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아이의 존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만 언급하세요. 부정적인 내용을 사람과 연결 짓지 마세요. “너는 방이 이렇게 지저분해지도록 두다니, 아무 생각이 없구나” 대신 “방이 지저분하구나”라고만 말하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감정코칭은 아동이나 청소년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감정코칭의 원칙을 저의 말로 “마음을 위로하되,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게 하라”로 바꾸어 조정 심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갈등을 겪는 당사자들의 상황과 감정에는 공감하되,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며 그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조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제가 인사위원으로 있던 기관에서 상사(이하 ‘가해자’로 부르겠습니다)의 갑질과 성희롱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직원(이하 ‘피해자’로 부르겠습니다)이 내부 진정을 하고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인사위원회가 소집된 일이 있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사일 뿐 아니라, 대학 시절 피해자를 가르치기도 한 사이였습니다. 또 피해자는 가해자의 추천으로 그 기관에 취업해 가해자의 일을 보조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기관에서는 규정에 따라 가해자, 피해자, 참고인의 진술을 정리하고, 판단을 위해 인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피해자 진술 기록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주말, 야간을 가리지 않고 SNS로 업무 지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업무 완수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폭언을 하고, 주말에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일을 시키면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도 했습니다. 가해자 진술 기록에 따르면, 가해자는 주말과 야간에 SNS로 업무 지시를 한 적은 있지만, 피해자가 이에 대해 불편하다는 의사 표현을 한 적이 없었던 데다가 피해자의 업무 처리가 늦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말에 집으로 불러 일을 하도록 한 적도 있기는 하지만, 신체 접촉을 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피해자에게 많은 일을 하도록 한 것은 피해자의 업무 성과를 위해 조력하고자 한 것이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관계는 어느 정도 분명한데, 이에 대한 관점이 서로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몹시 경직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열린 인사위원회에서는 피해자 의견 청취가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기관의 업무와 관련된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중 주요한 질문은 “주말과 야간에 사적인 경로로 전달된 업무 지시를 열어보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왜 열어보았습니까?”, “부당한 업무 지시와 신체 접촉에 대해 왜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 “직장 내 괴롭힘이 오래 전에 시작되었는데 왜 이제 와서 진정을 하였습니까?” 등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계속되자 피해자는 얼굴이 더 상기되고 격앙되어 말을 더듬기도 하면서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질문이 마무리된 후 저는 감정 코칭의 원칙을 적용해 피해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쳤던 선생님이 SNS로 연락을 할 때 난처하셨지요?”, “주말이나 야간에 업무 지시를 받았어도 자신을 가르쳤던 분을 거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말에 일을 하러 가해자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많이 당황하셨겠어요”라며 피해자의 마음을 읽어주려 노력하자 이전까지 말을 더듬던 피해자는 이때부터 말을 더듬지 않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또렷이 했을 뿐 아니라 앞에서의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큰 변화였습니다.
이어서 “당황스럽고 억울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즉각적으로 대처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진정 사건을 소송으로 이어갔을 때 절차는 어떨지, 결과는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감정은 수용하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피해자가 자신의 행동 범위에 경계를 지을 수 있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피해자는 “처음에 이 사건에 대해 직장 안에서 진정을 했을 때에는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아, 그렇다면 소송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인사위원회에서 제 입장을 헤아려 주시고 합당한 결정을 내려준다면 법적인 분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법적인 분쟁으로 이어갈 때의 어려운 점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대신, 당사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자 노력한 결과이지요.
피해자가 나가고 가해자가 입장했습니다. 가해자 역시 자신의 선한 의도와 달리 피해자가 너무 크게 오해를 한 것에 대해 억울해하고 있었습니다. 위원회에서 먼저 나온 질문은 “한 학기 수업을 가르쳤던 학생이라고 직장에서도 학생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왜 업무 시간이 아닐 때 사적으로 연락해서 업무 지시를 했습니까?”, “주말에 부하 직원을 불러서 신체 접촉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가해자 역시 상기된 채로 모든 것이 오해 내지 음모이므로 자신은 그 어떤 처벌도 받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저는 “자신의 행동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받아들여져서 당황스러우시겠습니다”, “가르쳤던 학생이자 추천했던 직원이어서 편하게 생각하셨습니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미처 못하셨나 봅니다” 등의 말로 가해자의 감정을 짚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상사로부터 폭언을 듣고 신체 접촉을 당한 입장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가해자가 인정하니 주말이나 야간 업무 지시, 폭언, 사적인 공간에 부하 직원을 불러 신체접촉을 한 행위에 대해 위원회가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피해자는 소송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며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함을 당사자가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가해자도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피해자가 소송을 하지 않는다면 인사위원회의 결정을 수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위원들만 모인 자리에서 가해자에 대한 징계 수위가 결정되었는데, 다른 위원들께서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저의 질문들로 인해 빨리 마칠 수 있었다고 하시며 좀 더 일찍 개입하지 그랬냐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소송은 없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자랑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네요. 이처럼 마음은 위로하되, 행동의 결과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 감정 코칭의 핵심이자 갈등을 중재하는 원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그 원칙을 더 잘 아시고 능숙하게 활용하시겠지만, 감히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려 봅니다. 그리고 앞의 사례는 익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약간의 수정과 각색을 덧붙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