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본문 하단

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명절마다 상처를 공유하는 사이
- 영화 <걸어도 걸어도>

  •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이미지 1
사진 : 필자 제공

명절은 불안을 일으킵니다. 가족의 말 때문입니다. “너 요즘 뭐하니?”, “어떻게 살아?” 이 별거 아닌 것 같은 질문은 명절에 불안의 공기를 주입합니다. 학생은 1등급이 아니라면 불안하고요, 취업준비생은 그냥 불안합니다. 취업을 해도 회사의 유명세와 연봉 때문에 말을 아끼게 되고요. 결혼, 출산, 경제 상황 등 어느 하나라도 잘 안 풀리는 문제가 있다면 불안은 가족 사이로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불안을 담은 대화가 장시간 이어지면,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인다는 건 상처를 주고받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기자가 되었을 때, 그런 명절이 있었습니다. “너가 무슨 기자야, 공무원이나 해”, “누구는 대기업 갔다고 하던데?” 기자가 되고 나서 친척들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그들은 기자가 돈을 못 버는 일이라면서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연봉 높은 대기업 직원이 될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기자는 일이 힘들고 가족을 잘 못 챙긴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다들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한마디씩 거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적 이슈부터 기자를 비하하는 말인 ‘기레기’ 이야기까지 넘어갔죠. 모두 제가 기자가 된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날카로운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상처받고 있었는데요.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편안하게 느껴진 날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족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너 요즘 뭐하니”, “어떻게 살아?” 평소처럼 사사로운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무도 큰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을 떠날 때 다음 명절을 기약했죠. 그날 가족의 모습은 저에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줬습니다. ‘아, 그래도 우리는 다시 만나는구나’.

그날을 생각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가 떠올랐습니다. 상처를 통해 감정의 균열을 일으키지만, 늘 함께하는 가족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겠습니다. 주인공인 ‘료타’는 죽은 형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부모님 댁으로 갑니다. 아내와 아들도 함께. 형 준페이는 10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료타의 누나인 ‘지나미’ 역시 남편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료타는 1박 2일 동안 부모님 댁에 머무르는데요.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와 평생 주부로 살아온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을 뜻하지 않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요리하고요,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재혼한 아들이 별일 없는지 안부를 묻고요. 은퇴한 아버지는 말수가 적습니다. 누나 지나미는 아버지의 옛 진료소를 자기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바꾸어 이사할 생각에만 부풀어 있고요. 료타는 현재 실업자이지만, 이를 티 내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보며 바쁜 척을 합니다. 전 남편과 사별하고 료타와 재혼한 ‘유카리’는 가족들의 태도에 마음이 상하지만 티 내지 않습니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서로 상처를 툭툭 건드리는 말을 반복적으로 뱉지만, 폭발하지 않고 흘러갑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애 딸린 여자와 재혼한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데요. “그런데 말이다. 고르다 고른 게 하필 ‘중고’라니. 사별은 죽은 남편과 비교를 당해서 힘들어. 차라리 이혼이 낫지”라며 며느리를 ‘중고’라고 서슴없이 말하고요. 이에 딸은 “엄마는 일을 안 해봐서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라고 말하죠.

어머니는 “너는 걸핏하면 엄마가 일 안 해봤다고 무시하는구나?”라고 받아칩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요리를 합니다. 가족 구성원 중 직접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접적이지만 잔인한 말로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죠. 하지만 누구 하나 폭발하지 않고 담담하게 혹은 웃으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아버지는 며느리를 앞에 두고 “아이 딸린 과부는 재혼하기가 힘들지. 아무튼, 아들, 먹고는 사는 거냐?”라고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데요. 실업자인 료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이 딸린 과부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리죠”라고 거짓말합니다.

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이미지 2

이러한 대화는 아무 사건 없이도 몰입하게 합니다. 대화가 만드는 미묘한 리듬 때문입니다. 이 리듬이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평온한 집안에 날카로운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보는 이들은 긴장하지만, 정작 대화를 하는 가족들은 평온해 보입니다. 저 흉기로 가족 중 누군가를 찌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니까요. 앞서 제가 가족들과 나눴던 대화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기자에 대해 가족들이 많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들이 저를 공격하는 것이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가족이니까요.

그래서 더 잔인합니다. 저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쉽게 상처 줄 수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명찰을 단 사람들이 모여 앉아 “가족끼리 이정도 얘기는 할 수 있잖아?”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칼을 들이댑니다. 가깝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가족의 말일수록 더 날카롭게 베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가족을 생각하고, 함께 밥을 먹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가족은 상처의 역사를 공유하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선 형 준페이의 죽음이 그 역할을 합니다. 준페이 형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아내를 ‘중고’ 취급해도, 아버지가 형과 비교하며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도, 료타가 부모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준페이 형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큰 상처 속에 살아가는 부모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말로 살갗이 베이는 것 정도는 심장을 도려낼 만큼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상처의 역사를 들추지 않는 것은 평화를 유지합니다. 역사를 알고 있는 가족들은 상처가 담겨 있는 함을 열어보지 않습니다. 각자 가진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치명적인 상처일수록 더 깊이 도려내야 하는 법이니까요. 사사로운 상처가 큰 상처의 고통을 잊게 할지도 모릅니다. 제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처럼,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안정함은 수많은 상처 속에서도 가족을 또 만나게 합니다.

영화가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을 살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료타와 어머니는 대화 중에 한 스모 선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요. 료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야 그 이름을 떠올립니다. “늘 이렇다니까, 꼭 한발씩 늦어”라고 말하며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죠. 떠나는 아들 가족을 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음 설에 보겠군”이라고 말합니다. 1박 2일 동안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 대했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건 그 태도와는 별개인 겁니다. 하지만 료타와 어머니는 끝내 스모선수 이야기를 다시 하지 못했습니다. 3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뒤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작은 상처를 내어주고 큰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작은 상처보다 오히려 가족이 고민하고 있을 스모선수를 빨리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하죠. 또한, 상처를 주고받으며 불안한 마음을 느끼는 건 가족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흔들려서 그대 품속으로” 영화 삽입곡인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의 이 가사처럼, 가족들은 저를 불안하게 하지만 같은 배 위에서 불안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