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무의식적인 편견
- 글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몇 년 전 일인데, 코벤트 가든의 오페라 하우스에 공연을 보러 갔다. 옆자리에 앉은 건 부부로 짐작되는 초로의 백인들이었다. 으레 하는 저녁 인사를 나누고 나자 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런던은 처음 방문했느냐, 아니면 전에도 와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런던에 살고 있다고 대답하자 이 부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경우 아무래도 감정을 숨기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래도 사과는 하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년 말 영국에서는 왕비 커밀라가 주최한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한 흑인 여성이 왕실 고위 관계자에게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트위터에 그 전말을 밝히는 일이 벌어졌다. 아프리카와 카리브계 가정폭력 피해자 여성들을 돕는 단체인 시스타 스페이스의 대표인 응고지 풀라니는 '레이디 SH'라는 왕실 고위직원이 마치 심문하듯 자신의 출신을 캐물었다고 했다. 어디서 왔냐는 레이디 SH의 질문에 풀라니가 본인은 영국인이고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대답하자 레이디 SH는 ‘너희 일족 (your people)’이 어디서 왔느냐, 풀라니가 영국에 온 것은 몇 살 때냐고 다시 물었다고 한다. 풀라니가 다시 본인은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고 자기 부모는 50년대에 영국에 왔다고 대답하자 레이디 SH는 “드디어 알았네, 카리브해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레이디 SH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최측근이자 윌리엄 왕세자의 대모인 수전 허시로 밝혀졌다. 현재 83세인데, 귀족의 딸로 태어나 20살 때부터 궁정에서 일을 했으니 평생을 왕실과 귀족에 둘러싸여 살아온 셈이다. 허시는 코로나로 인한 전면봉쇄 중에도 여왕 부부와 함께 지냈고, 여왕 남편 필립공 장례식 때 유일하게 여왕 옆에 있었을 정도로 여왕의 신임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 후, 새로운 국왕 찰스 3세는 어머니의 측근 인사 대부분을 교체했지만 허시는 궁정에 남도록 했다. 이런 정도로 왕실의 신망이 두터웠던 허시지만 풀라니와의 대화가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자 영국 왕실은 즉각 사과하고 허시를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첫 문단의 질문이 왜 사과할 일인지, 또는 레이디 허시의 발언이 왜 인종차별적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듯하다. 저런 정도는 할 수 있는 말이라거나, 심지어 맞는 말 아닌가 하는 의문조차 생길 것이다. 하지만 영국 왕실은 허시의 질문이 인종차별적이라고 인정하고, 해당 발언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외모에 기반한 판단, 즉 유색인의 경우 당연히 런던에 거주할 리가 없고 관광객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백인이 아니어도 영국에 ‘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색인이라면 비록 영국에서 나고 자란데다가 영국 국적이라고 하더라도 ‘원래는’ 영국인이 아니라는 발언은 백인만이 ‘진짜로’ 영국인일 것이라는 편견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 태어나고 영국에서 자란 영국 국적의 사람은 ‘영국인’이다. 심지어 돌아가거나 소속감을 느끼는 ‘고국’이 없는 경우도 많다. 허시의 질문은 ‘이런 영국인’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영국인으로 끼워주지 않겠다는 배제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영국 왕실이 이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재빠르게 사과를 하고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은 이미 왕실 내 차별에 대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자인 해리 및 그 부인인 메건은 영국 왕실이 흑인 혼혈인 메건에 대하여 차별적인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이들 사이에 태어날 아들의 피부색에 대하여 우려하기도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들 부부에 따르면 왕실은 무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고 이는 영국에 만연한 인종차별 문제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왕자 부부의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으니, 왕실로서는 인종차별적이라는 주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과연 한국에서는 그 외모로 보아 일견 ‘한국적’이지 않은 한국인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당연히 본인이나 그 부모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에 대하여 한국 국적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진짜로’ 내지 ‘원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캐묻지는 않을까.
다만, 이런 편견 및 그로 인한 차별적 언행은 한국뿐 아니라 다양성에 익숙하지 않은 상당수의 사회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많은 유럽 나라의 공항에는 쉥겐 조약 가입국 내지 유럽 연합(EU) 국민이 이용하는 통로와 쉥겐 조약 비가입국민이 이용하는 통로가 분리되어 있다. 쉥겐 조약 가입국 및 EU 국민은 대개 백인이다. 동양인인 내가 그 통로들 근처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관리하는 직원이 매우 냉정하게 비 쉥겐 국가 통로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내가 만일 어렵사리 EU 국적을 획득한 EU 국민이라면 이런 일을 당할 때 좀 서럽고 억울하기도 하겠다 싶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내가 원해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큰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기꺼이 가르쳐주는 통로로 가고,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는 선뜻 ‘원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해 준다. 그러니 차별이란, 민감한 사람들의 상처에 무심하게 뿌리는 고춧가루 같은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