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영국 최초 ‘아시안’ 총리
- 글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영국에서 ‘아시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출신자 또는 그 후손을 말한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은 이에 비하여 극동(Far Asia)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그냥 각 나라를 따로 일컫는다. 영국에서 아시안은 백인 다음으로 가장 인구가 많다. 2018년 영국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계는 영국 전체 인구의 2.5%, 즉 백사십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파키스탄계는 약 2% 정도, 백십만 명에 달한다.
아무래도 이 세 나라가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대영제국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즉 브리티시 라지(British Raj)를 직접 지배했다. 인도 제국은 독립할 때 종교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었다. 인도는 힌두교가,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대세다. 이후 1971년 파키스탄에서 동 파키스탄이 갈라져 나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된다.
이들 중 힌두교도들에게는 ‘디왈리’가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나다. 디왈리는 대략 10월 중에 있지만 힌두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에 해당한다고 한다. 디왈리는 빛이 어둠을, 선이 악을, 지혜가 무지를 이긴 것을 상징하는데, 빛의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집집마다 ‘디야’라는 이름의 초를 밝히고 집과 몸을 정결히 하는 등으로 새로운 해를 준비한다. 올해의 디왈리는 전 세계 인도인들에게 각별한 날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인 이민자의 아들이자 힌두교도인 리시 수낙(Rishi Sunak)이 디왈리 첫날 영국의 총리로 지명된 것이다. 백인이 아닌 사람이 영국의 총리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아시안’ 내지 기타 비백인들에게도 특별한 일이다.
수낙은 단순히 인도 혈통을 물려받은 것만이 아니라 신자로서 활발하게 종교 활동에 참여한다. 선거에 있어서도 인도계 힌두교도로서 본인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인도 펀잡(Punjab) 출신이지만 아프리카로 이민을 갔다가 1960년대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왔다. 아버지는 가정의(GP, 보건소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1차 의료기관)였고 어머니는 약사다. 영국에서 태어난 수낙은 유명 사립학교인 윈체스터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로 진학한 다음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부인이 된 아크샤타 무르시를 만났는데, 무르시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IT 회사 인포시스의 창업주다. 수낙 부부의 재산은 7억 3천만 파운드에 달한다. 한화로 환산하면 1조가 넘는다.
9월 초에 전전임 총리인 보리스 존슨이 여러 가지 스캔들로 인해 사임 압력을 받던 끝에 물러났다. 이어진 총리 경선에서 수낙은 백인 여성인 리즈 트러스에게 패했다. 애초에 가장 선호도가 높은 후보였던 수낙이 끝내 트러스를 이기지 못한 데는 몇몇 이유가 거론된다. 먼저 보리스 존슨이 사임하고 바로 몇 시간 후에 총리 출마에 나설 것을 밝혀서 배신자라는 인상을 줬다는 의견이 있다. 존슨 내각에서 가장 먼저 사임한 장관이라는 점도 이런 시선에 한몫을 더했다.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수낙의 아내가 세금 관련 비 영국 거주자의 지위를 유지한 사실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들 부부가 여왕보다도 재산이 많은데 영국에 세금은 안낸다며 공격을 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얘기들은 어쩌면 그가 백인이 아니라는 가장 근본적이지만 누구도 선뜻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를 덮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수낙이 총리가 되기 직전인 10월 22일 LBC 라디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스스로 보수당원이고 이름은 ‘제리’라고 밝힌 남자는 수낙은 영국인이 아니라거나(사실이 아니다) 영국을 사랑하지 않는 인물이라 일반 보수당원들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행자의 거듭된 추궁 끝에 제리는 다수 영국인들은 백인이고 그들은 자기들을 반영하는 총리를 원한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오로지 피부 색깔 때문에 수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냐고 다시 묻자 제리는 그게 아니라 수낙이 코로나 시기에 재무장관으로서 경제를 망쳤기 때문에 지지하지 않는 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수낙을 불과 6주 전에 물리친 트러스는 겨우 44일 재임한 후 경제정책의 대실패로 인해 사임했다. 수낙은 트러스를 대신해 영국 경제와 혼란에 빠진 보수당을 살릴 사람으로 지목받은 것이다.
영국의 아시안들은 최초의 아시안 총리가 배출된 데 대해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초 기득권적인 배경, 즉 엘리트 교육과 막대한 부 때문에 쉽사리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CNN이 영국 각지의 아시안을 대상으로 행한 인터뷰 기사에서 한 인도인 의사는 ‘수낙보다는 오히려 근로계층 출신의 백인 의원들이 보다 본인과 비슷하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수낙을 총리로 선정한 것은 영국 사회의 저력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이민자 또는 소위 다문화 가정 출신의 정치인이 등장하여 대통령이 되는 장면을 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영국 언론들이 다인종 사회를 반영하는 시선 또한 인도계 힌두교도인 총리의 등장으로 인해 한층 더 풍부해졌다고 하겠다. 이번 디왈리에는 수낙이 축제에 참여하는 사진을 영국 신문들에서 볼 수 있었다. 매해 있었을 인도 명절의 존재를 새삼 안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