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왕실의 호칭
- 글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가 합쳐져 있는 나라 영국의 왕세자 공식 칭호는 웨일스 공, 즉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호칭은 원래 웨일스 공국의 군주를 일컫는 것이었다. 1283년 웨일스가 독립국의 지위를 잃으면서 1301년 잉글랜드 왕의 아들에게 처음으로 이 호칭이 부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415년부터는 영국의 왕세자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알고 보면 영국 역시 지역색도 강하고 지역감정도 심하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사람들 사이에 호감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전에 웨일스 출신 변호사로부터 대체 왜 잉글랜드 여왕의 아들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인 거냐고, 자기 집 개 이름이 ‘프린스’인데 그 개가 웨일스와의 인연이 더 깊을 거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있다.
가장 오래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은 최근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으로 영국 왕이 된 찰스 3세이다. 9살 때 호칭을 부여받았고 73세가 되어서야 이 타이틀을 떼고 왕이 되었으니 64년 동안 왕세자였다. 본인 포함 누구도 그가 이렇게 오랜 동안 그 호칭을 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인 엘리자베스 2세가 가장 오래 산 동시에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영국 군주인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96세까지 살았고 장장 70년간 왕위에 있었다.
일찍이 찰스 3세는 엄마인 엘리자베스 2세가 은퇴를 좀 하고 자기가 왕이 되면 어떨까 하는 바람을 비춘 바 있지만 깨끗이 무시당했다. 영국의 군주 노릇이란 보기보다 고되다고 하는데, 여왕이 돌아가기 이틀 전까지 새로운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등으로 그 직을 공들여 유지한 이유는 그 아들이 너무나 대중적 인기가 없었던 것도 큰 이유로 보인다. 이렇게나 인기 없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가는 왕실의 존립을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에도 뭐 그리 인기가 드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팽개쳐두고 외도를 했던데 있다. 그 외도 상대가 이번에 왕비(퀸 컨소트, Queen Consort)라는 호칭을 받아 화제가 된 카밀라다.
일단 퀸(Queen), 즉 여왕이라고 번역되는 용어는 영국의 경우 핏줄에 의해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여성에 한정되는 호칭이다. 왕비는 퀸이라고 하지 않고 퀸 컨소트라고 부른다. 참고로 여왕 배우자의 공식 호칭은 킹 컨소트(King Consort)가 아니라 더 격이 낮은 프린스 컨소트(Prince Consort)다. 고 엘리자베스 2세의 배우자 고 필립 공이 싫어하던 호칭이라고 한다.
왕이 바뀌었으니 왕의 부인이 왕비라고 불리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카밀라의 경우 호칭을 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이애나는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결혼에는 세 사람이 있었고, 그래서 좀 시끄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말하자면, 다이애나의 불행한 결혼생활 및 이혼, 심지어 비극적인 죽음까지 카밀라의 탓으로 여겨졌다. 미움이 찰스 본인이 아니라 카밀라에게 쏟아졌던 것도 아이러니이기는 하다. 어쨌든 언론에서 카밀라를 부를 때는 온건하게는 왕자의 정부, 빈정거리는 의미에서는 “그 결혼에 있어서 세 번째 사람” 이런 식이었는데, 심하게는 ‘해그(hag)’라고까지 했다. 이는 마녀 또는 못생긴 늙은 여자라는 뜻이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카밀라를 퀸 컨소트라고 할 것이냐, 아니라면 그럼 뭐라 부를 것이냐는 매우 뜨거운 국민적 논란의 대상이었다.
찰스와 카밀라는 1971년 여름 처음 만나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둘 다 20대 초반이던 시절이다. 이유가 뭐든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카밀라는 1973년 앤드류 파커-볼스라는 이름의 장교와 결혼하여 자녀도 둔다. 하지만 왕세자와 카밀라는 대략 198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사귀기 시작한 듯하다. 1997년 다이애나가 사고사한 후 2005년 카밀라는 드디어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왕세자비, 즉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Princess of Wales)’라는 호칭을 쓰지 못했다. 영국 국민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던 왕세자비는 다이애나였으니 함부로 왕세자비라는 호칭을 줬다가 왕실에 대한 대대적 반감을 불러일으킬까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국민적인 미움을 받던 카밀라가 긴 세월을 견딘 끝에 왕실 및 국민의 인정을 받고 결국 왕비라는 칭호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인디펜던트는 이를 사랑의 승리라고 분석했지만 언론이 카밀라의 편으로 돌아선 덕이 크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알고 보니 성격도 좋고, 시어머니인 여왕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찰스 3세가 매우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모두 언론을 통해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 기간 찰스가 짜증을 부리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을 때, 더 타임스는 이런 성정의 찰스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카밀라 뿐이라는 기사를 냈다. 기사에는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왕실 바깥의 ‘진짜’ 세상에서 살아서 물정을 안다는 것도 장점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새로운 국왕 부처와 언론의 밀월기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