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슴 PD의 분쟁현장 르포
취재와 패션
- 글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PD)
남들은 겨울이 오면 여름옷을 정리해 넣어두고 겨울옷을 꺼내놓는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겨울에 더운 나라 취재를 가기도 하고, 뜨거운 삼복더위에 남반구로 떠나기도 하니까요. 취재지가 결정되면 바로 그 나라 계절과 온도를 확인한 뒤 짐을 꾸립니다. 취재 가서 입는 옷은 무조건 편한 옷 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녀야 하기에 활동성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중고 옷이 최고입니다. 재활용 옷을 파는 곳에서 무게로 달아주는 티셔츠나 남들 입고 버릴만한 옷을 들고 가 현지인에게 주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 주요 인사들과 인터뷰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 정장 한 벌은 챙깁니다. 그마저도 눈독을 들이는 현지 스텝이 있으면 선물로 주고 옵니다. 그래서 귀국길에는 대부분 입고 있는 옷 달랑 한 벌 뿐입니다.
언젠가 12월 인도네시아에서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귀국 비행기에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탔는데 한국에 도착하니 영하의 날씨에 폭설이 쏟아지는 겁니다. 가벼운 패딩이 있었는데 그건 현지 운전기사님이 탐을 내셔서 드리고 왔고 카디건 하나로 버티며 집에 가려 했습니다. 한국 공항에 도착한 제 모습은 그야말로 여름 바캉스 차림이었는데 하필 그때, 급하게 라디오 인터뷰 섭외가 왔습니다. 국제적으로 엄청 큰 사건이 터진 겁니다. 급한 대로 뛰어가 택시를 타니 택시기사님이 깜짝 놀랍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줄 알았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자꾸 웃으십니다. 방송사에 도착하니 옷은 바캉스 차림인데, 아뿔싸 ‘보이는 라디오’라고 합니다. 또 급한 대로 아는 작가님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본인 패딩을 주시며 우선 입고 방송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겨우 빌린 패딩을 입고 방송을 마쳤습니다.
저는 취재 다닐 때 주로 원피스를 하나 챙겨 갑니다. 사실 평상시 한국에서는 원피스를 입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맨날 고생스럽게 촬영만 다니는데 원피스를 어떻게 입겠습니까. 그런데 해외취재를 할 때 원피스가 가장 필요한 곳이 있는데 바로 국경을 넘어갈 때입니다. 어느 나라든 육로로 국경을 넘어갈 때면 근처 마을의 식당 같은데 들어가 ‘샤랄라~’한 스타일의 원피스로 갈아입습니다. 국경지역에는 늘 출입국 하려는 사람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죠.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는 문이 닫히는 곳도 많습니다. 만약 시간을 맞춰 국경을 넘지 못하면 그 지역에서 하루를 더 머문 뒤 다시 아침에 일어나 줄을 서야 합니다. 하루를 잃는 것은 취재진에게 큰 타격입니다. 어떻게든 국경에서 최소한으로 시간을 줄여야합니다. 이렇게 국경을 넘는 것은 품도 많이 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때론 취재 장비를 보고 정보국 사람들이 나와 조사를 할 때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일주일가량 발이 묶인 채 장비검사에, 피의자 심문 버금가는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국경을 넘을 때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도록 호감을 주는 차림새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먼저 ‘샤랄라’ 스타일 원피스를 입고 현지인들 틈에서 한국 여권을 들고 줄을 섭니다. 한국인은 거의 없는 나라이니 제가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누군가 다가옵니다. 국경 수비대나 정보국 직원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에게 “마담? (아주 희귀하게 ‘마드모아젤’) 더운데 여권 줘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 걸렸구나.’합니다. 그 ‘걸렸다’는 것이 안 좋은 의미가 아니고 패스트트랙에 당첨됐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저를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 데리고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라며 친절을 베풉니다. 그리고 제 여권은 다른 사람에게 도장을 찍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홍차도 한 잔 얻어 마십니다. 저는 예의상 그들과 몇 마디 멘트를 주고받습니다. 한국에 대해, 김정은에 대해, 혹은 K팝 스타 등등 여러 가지를 묻곤 합니다. 성실하게 웃으며 대답해주다가 간혹 중요한 취재 정보를 그들에게 듣고 섭외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도장 찍힌 여권을 손에 쥐어 줍니다. 저는 도장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채 유유히 국경을 통과합니다. 그렇게 국경이 멀어지면 저랑 일하는 운전기사가 알아서 옷 갈아입을 수 있는 곳에 세워줍니다. “마담, 취재장비 이제 갈아입어도 돼요.” 제 ‘샤랄라’ 원피스는 취재 장비입니다.
이슬람권 나라에 가면 저는 철저히 히잡(이슬람식 머리 두건)과 아바야(어깨에서 발끝까지 쓰는 이슬람 복장)를 입고 다닙니다. 그들 눈에 이교도로 보이는 것 보다는 눈에 잘 안 띄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마찰이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외국인 여성이더라도 짧은 옷을 입고 다니면 바로 위험해 처할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부르카(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쓰는 민속의상)를 쓰고 다닙니다. 설령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들은 ‘남의 문화를 존중하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호감을 갖습니다. 저 또한 그들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습니다. 최대한 현지문화에 맞춰야 취재고 뭐고 할 수 있는데 복장 정도 못 맞추겠습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났을 때 ‘비즈니스’만 있고 ‘하트’가 없으면 그 만남이 제대로 진행 되겠습니까. 취재도 중요하지만 제가 그 사람들을 만나는 그 순간 역시 제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입니다. 일만하고 사는 것보다 사람들과 서로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값지다고 생각하니까요.
요새 이슬람권 나라 여성들 사이에서 바바리코트를 아바야 위에 덧입는 것이 유행입니다. 코트가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니 나름 종교가 엄격한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는 패션입니다. 저는 더운 나라인데 바바리코트를 껴입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인터넷으로 서구 여성들의 패션을 많이 보는 시대이다 보니 이슬람 여성들의 패션 유행도 자주 바뀝니다. 한번은 제게 물어보더라고요. 한국 여성들도 바바리코트를 좋아하느냐고요. 무심코 ‘바바리맨이 유명하긴 한데….’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절대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새가슴이기도 하고 종교적으로 무장된 그들이 충격 받을까 봐서요. 하여간 취재 패션은 늘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데, 이게 바로 문화와 관습이 다른 나라를 다니는 묘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