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식물이 적을 만났을 때
- 글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가만히 먹히지 않으리!
우리에게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 반해 겁 많고 온순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식물에겐 육식동물은 지나가는 나그네지만 초식동물은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이죠. 게다가 도망갈 수 없는 식물의 입장에선 정말 두려운 존재일 겁니다. 우리가 숲속에서 호랑이나 곰을 만났는데 꼼짝할 수 없다면 얼마나 두려울까요? 식물은 이 공포의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무서운 적을 물리칠까요?
초식동물에 대한 식물의 방어를 숙주-식물 방어(host-plant resistance, HPR)라고 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적을 만나면 공격보다 방어가 중요하겠죠. 식물은 본의 아니게 당당히 적과 맞서게 되었지만 현명하게 이겨냈습니다. 방어 기전을 살펴보면 가만히 먹히지 않겠다는 필사적 의지를 엿볼 수 있지요. 다양하고 기발한 방어 전략을 넘어 공격과 화해까지 하는 식물의 전략을 보며 나의 적을 물리칠 지혜를 얻어 볼까요?
기계적 방어전
울릉도는 화산폭발로 생겨나 육지와 연결된 적 없는 고립된 섬입니다. 울릉도에 도착해 눈에 띄는 문구는 ‘아름다운 신비의 섬’인데요. 울릉군을 상징하는 문구입니다. 저는 울릉도에 식물 채집을 가서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참 적합한 문구라 생각했는데요. 왜냐하면 울릉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기한 식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름에 ‘섬’이라는 단어가 붙은 식물이 많은데, 섬나무딸기, 섬노루귀, 섬개야광나무, 섬시호, 섬개현삼, 섬자리공 등이죠. 육지에 사는 식물과 닮았지만 울릉도 식물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릉도 식물은 육지 식물보다 털과 가시가 적어 손을 다치지 않고 쉽게 채집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육지에 서식하는 산딸기는 줄기에 가시가 많은데 울릉도에 사는 섬나무딸기는 털과 가시가 없는 매끈한 줄기를 가지고 있었죠. 학자들은 예로부터 울릉도에 초식 포유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 기전이 부족한 것이라 추론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울릉도 식물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들이 섬나무딸기를 육지로 가져와서 키우자 가시가 자라났다고 합니다.
식물의 기계적 방어에는 털이나 가시 형성 외에도 초식동물의 접근이 어려운 잎과 줄기의 배열, 딱딱한 껍질이나 표면, 먹기 힘든 미끄러운 재질, 진액이나 왁스를 덮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미모사처럼 건드리면 즉각적으로 움직여 초식동물을 쫓아내거나, 시계꽃류처럼 나비알 모양을 만들어 다른 나비의 접근을 꺼리게 하는 적극적 방어도 하지요.
화학적 방어
어떤 식물들은 꺾거나 자르면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등의 유액이 나옵니다. 박주가리에서 하얀색, 애기똥풀에서 노란색, 피나물에서 빨간색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식물의 유액은 초식동물이나 병원체를 방어하거나 상처를 자가 치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유액을 내는 식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식물에는 양귀비가 있습니다. 양귀비에 상처가 나면 유백색 유액이 나오는데 이를 모아 건조해 아편을 만들고, 정제해 모르핀을 만드는 것이죠.
마약이 생산되기 때문에 양귀비를 키우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래서 실제 양귀비를 본 사람은 많이 없을 텐데요. 양귀비 씨앗은 의외로 이미 많은 분이 먹어 보았답니다. 참깨보다 작은 검은색 양귀비 씨앗은 흔히 빵과 쿠키의 속을 채우거나 겉면을 장식하는 재료입니다. 양귀비 씨앗에는 마약 물질이 거의 없어 중독되지 않지만 많이 먹으면 마약 검사 때 가짜 양성 반응이 나올 수 있어 조심해야 하지요. 양귀비과의 식물은 흰색, 유백색, 노란색, 빨간색 등의 유액을 냅니다. 이들 중 다수가 유독해서 양귀비과 식물을 먹은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요.
초식동물을 방어하기 위해 합성한 화학물질은 동물에게 고통 외에도 마비,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천적을 호출하는 신호탄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 맛없는 식물로 변하게 만들어 동물이 자신을 잡아먹는 걸 중단하게 만들기도 하는데요. 과일이 완전하게 성숙된 씨앗을 만들기 전에 시고 떫은맛을 가지는 것도 식물의 ‘맛없음’ 방어와 관련이 있지요. 동물을 방어하는 화학물질은 식물 세포가 파괴될 때 자동으로 방출되기도 하지만 동물에게서 나오는 화학물질 유도체에 반응하여 생산하기도 합니다. 동물에게 일부가 먹히면 동물이 맛없게 느끼는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것이죠. 메틸 자스모네이트(Methyl jasmonate)와 같은 물질은 초식동물이 싫어하는 맛을 가져 식물이 먹히는 것을 줄이고 곤충의 성장 발달을 저해합니다. 그래서 배추, 무, 담배 등의 작물에 뿌려 그 효과를 이용하기도 하지요.
최근 토마토를 통한 연구에서 메틸 자스모네이트를 뿌리면 토마토를 먹는 애벌레가 토마토 먹기를 중단하여 동족을 잡아먹게 한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서로를 잡아먹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데요. 학자들은 이 현상을 보고 식물의 화학물질이 동물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유발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맞서기보다 공존하기
식물과 초식동물은 이들의 탄생 이래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지속하며 치열하게 공진화해 왔습니다. 동물은 식물을 물어뜯거나 갉아먹고, 수액을 빨아먹거나 조직을 뜯어가기도 합니다. 식물은 이런 여러 공격 방식에 대항하며 진화하였죠. 백악기에 현화식물이 다양하게 진화한 것은 식물을 먹는 곤충의 다양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식물의 경우 동물의 공격으로 일부분을 잃게 되면 그 식물의 번식능력이 증가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동물은 배를 불리고, 식물은 더 건강하고 강해지도록 상호 작용하게 진화한 것입니다. 이렇듯 식물은 동물에게 공격당하면서도 동물과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방어를 우선하되 필요하다면 공격과 화해까지. 식물이 적을 다루는 전략을 보며 우리도 적과 공존하는 최고의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