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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차선 방향만큼 다른 진료실 풍경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자동차가 왼쪽 차선으로 주행하는 것 말고도 한국에 비해 영국의 다른 점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의료 시스템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환자가 병원을 골라서 갈 수 있다. 지나가다 간판을 보고 진료를 받으러 들어갈 수 있다. 본인이 감기라고 생각하면 가정의학과든 내과든 이비인후과든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병원들도 내과, 이비인후과, 외과, 피부과, 산부인과 등등 전문 영역별로 개원을 하고 환자를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의료 서비스가 직거래되는 셈이다.

하지만 영국의 의료 소비자들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영국에서는 거주지 근처의 가정의학과(General Practice, GP)에 등록을 하게 되는데, 몸과 마음의 건강과 관련하여서는 일단 이 GP를 찾아가야 한다. 막바로 전문의를 찾아갈 수는 없다. 물론 국가의료보험(National Health Service, NHS)에 의지하지 않고 사립 병원을 찾아가면 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막대한 비용을 각오해야 한다. 이에 비해 NHS가 정한 경로대로 진료를 받으면 의사에게는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의사가 약품 처방전을 발행해주는 경우 약국에 처방전 비용을 내야 하지만 미성년자거나 고령자거나 임산부 및 출산한 지 1년 내거나 특별한 질환이 있는 등의 사정이 있으면 처방전 비용도 면제된다.

그나마 치과의 경우는 GP 의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찾아갈 수 있다. 다만 치과는 일반 GP와는 달리 NHS에 등록된 치과에서 진료를 받아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상황이 넉넉하지 않은 영국인들 가운데는 치아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다. 치과 역시 비용이 면제되는 환자들이 있기는 하다. 대개 처방전 비용 면제자들과 겹치지만 거기에 더해 요건에 맞는 저소득층도 포함된다.

GP 의사가 전문의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원 조치를 취해준다. 다만 GP 의사가 전원을 결정해줄 때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상당한데다가 전원된다고 해서 바로 해당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예약 후 대기해야 한다. 그러니 암과 같이 이제는 드물지 않은 중한 병도 조기에 이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흔한 병이 아니라면 긴 시간을 소비한 끝에 겨우 병명을 알게 되었으나, 진단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식의 이야기도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2

BBC에서 일하면서 가디언에 칼럼을 기고하던 케런 레비는 5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여행과 등산, 바다나 강에서 수영하기를 즐기는 건강한 여성이었다. 2019년 11월 위쪽 어금니 하나에 통증을 느낀 레비는 치과를 방문했다. 치과 의사는 엑스레이 결과를 보더니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 레비는 그 진단이 의아하기는 했으나 일단 안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통증은 3주간 지속되었고, 다시 치과를 방문한 레비는 엑스레이 결과를 볼 때 특별한 문제가 없으므로 치과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통증이 해를 넘겨 1월까지 지속되고 잇몸 색이 변하고 옆의 치아도 아프기 시작하는 등의 문제가 지속되자 레비는 다른 치과를 방문했다. 새로운 치과 의사는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엑스레이 상에 확실한 문제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치아가 통증 등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으므로 이후 레비는 GP 의사, 구강외과 및 안면통증 전문가 등을 전전한 끝에 2020년 4월이 되어서야 새로운 치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때는 이미 여러 개의 치아에 문제가 생겼고 전반적인 건강 상태도 나빠졌다고 한다. 레비는 이와 같은 본인의 사연을 적어 가디언에 기고하면서, 치통을 호소했음에도 애초에 신경 치료를 받지 못한 이유는 의사들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진료를 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엑스레이 상에 명확한 문제가 보이는 경우라야 신경 치료를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감독기관의 문책을 받거나 심지어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레비의 경우는 꽤나 운이 좋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의사들, 특히 GP의 경우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감기 증세가 있어 GP를 찾아가면 물을 많이 마시고 쉬라고 한다. 해열제나 진통제를 사서 먹으라고 하기도 한다. 염증이 있어야 항생제를 처방해 준다. 감기에 조제약을 처방해주고 심지어 주사도 놓아주곤 하는 한국식 진료를 기대하며 GP를 찾아가면 처음에는 약간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가벼운 증세로는 병원을 찾지 않게 된다. 가봐야 해주는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식 의료 시스템에 익숙한 입장에서는 영국의 의료 시스템이 매우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국인들과 이야기해보면 뜻밖에 NHS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와 만족도가 높다. 자기들의 시스템을 믿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신뢰란 이렇게 불안정한 시기를 견디는 힘이 되겠다 싶기도 하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편리하고 신속한 반면 과잉진료의 불안이 있고 빨리 빨리 환자를 보느라 의사 및 환자 모두에게 피로감이 있다면, 영국의 병원은 보다 차분하고 환자와 의사 간 관계도 좀 더 느긋하고 서로 예의바르다는 느낌을 준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가는 차선만큼이나 다른 풍경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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