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추위를 뚫고, 봄꽃!
- 글 신혜우 (그림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봄꽃과 꽃샘추위
베란다 창문으로 보이는 자두나무 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맺혀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창문 가까이 가 보니 아래 키 작은 매화나무에는 벌써 꽃이 피어 있었지요.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는 매화를 보니 다른 봄꽃들도 저를 기다리고만 있을 거 같았어요. 겨우내 추위로 산책을 미뤄두다가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나갔습니다. 봄까치꽃, 냉이, 서양민들레, 산수유까지 만났는데 생각보다 너무 추워 후다닥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전날 밤에는 눈이 내렸는지 멀리 보이는 산은 하얀 설산이 되어있었죠. 저녁에 뉴스를 보다 알게 되었는데 그날은 꽃샘추위가 유별나게 기승을 부린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꽃샘추위는 북쪽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영향으로 나타납니다. 봄꽃을 시샘하듯 겨울이 지나도 물러나지 않는 추위입니다. 눈까지 뿌리며 심술을 부리는 꽃샘추위를 봄꽃은 어떻게 견디는 걸까요?
언제부터 봄꽃은 추위를 견뎌냈을까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는 식물이 계절에 따라 모습이 바뀝니다. 가을에 추위를 대비하는 모습도, 봄꽃을 피우기까지 지루하게 추위를 견디는 것도 자연스럽죠. 그러나 지구의 역사 전체로 보면 꽃이 피는 식물이 겨울 추위와 싸우게 된 건 그리 오래된 건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만나는 꽃이 피는 식물을 현화식물(angiosperms), 혹은 속씨식물이라고 합니다. 현화식물은 3억 년 전 석탄기에 탄생했다고 추정하나 화석이 발견된 건 1억 2500만 년 전입니다. 1억 년 전 백악기에 지구에 널리 퍼져 육지를 가장 많이 차지한 식물군이 되었죠.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봄꽃은 모두 겨울을 견디고 꽃샘추위에 대비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구에는 반복적으로 빙기와 간빙기가 있었습니다. 얼음이 줄어드는 따뜻한 시절에는 많은 꽃이 겨울 걱정 없이 피어났을 겁니다. 그러다 계절이 뚜렷해지고 추위가 찾아오는 시절을 맞게 된 꽃들은 각각 나름의 진화를 통해 겨울에 대비하게 되었죠. 그래서 꽃 피는 식물이 추위를 견디는 방법은 진화적으로 독립적이고 다양합니다.
식물이 계절을 구별하는 법
북반구 온대와 남반구 온대의 계절은 반대입니다. 북반구에 있는 우리나라가 추운 겨울일 때 남반구에 있는 호주는 햇빛이 쨍쨍한 여름이지요. 식물은 자신이 있는 곳의 정확한 계절을 알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식물은 어떻게 보면 기상학자보다 정확한 날씨 관찰자이지요. 식물은 빛, 온도, 물을 관찰합니다. 식물이 빛을 관찰해 하루 24시간 중 낮과 밤의 길이를 알고 계절을 구별하는 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름에는 밤보다 낮의 길이가 길고, 겨울에는 낮보다 밤의 길이가 길지요. 이것을 인지해 호르몬이 바뀌고 계절에 맞춰 꽃을 피웁니다. 낮과 밤의 온도 변화를 관찰하여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특정 온도가 되어야만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강수량이나 토양 속 물의 양을 관찰하기도 하는데, 열대 지방은 대부분 햇빛이 강하고 온도가 높지만, 건기와 우기가 있어 물의 양에 큰 차이가 생깁니다. 이에 맞춰 꽃을 피우는 식물들도 있지요. 이렇듯 식물은 저마다의 세심한 관찰을 통해 꽃을 피우는데 기후변화가 오면 혼란스러워집니다. 더불어 도움을 주고받는 꽃가루 매개자들도 꽃을 만나지 못해 연달아 죽어가게 되지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추위에 얼어붙지 않도록 식물은 몸속 수분을 줄입니다. 당, 염분, 유기 화합물의 농도를 높이는 것도 어는점을 낮추어 식물체가 얼지 않도록 도움을 주지요. 나무의 경우 나뭇가지에 비해 연약한 잎과 꽃은 얼기 쉽습니다. 겨울에 잎과 꽃을 내놓지 않는 건 광합성을 할 햇빛이 부족하고 꽃가루 매개자들이 사라지기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봄에 수정이 필요한 봄꽃들은 여름부터 부지런히 내년 봄에 대비해 비늘잎과 털에 쌓인 꽃눈을 준비해 놓습니다. 나무뿌리 근처에 쌓인 낙엽은 겨울에 내린 눈과 함께 땅속에 있는 뿌리를 보호하는 단열 역할을 해 주지요. 많은 식물이 겨우내 꽃을 만들어 수정하거나 잎을 내어 광합성을 하지 못합니다. 식물들은 봄이 오면 언제 정확히 활동을 시작할지 고민하게 될 텐데요. 봄이 오고 남들보다 일찍 꽃과 잎을 내는 도박꾼 같은 식물도 있고, 다른 식물보다 한참을 기다리는 신중한 식물도 있습니다.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변덕스러운 초봄 날씨를 생각할 때 1등을 다투며 일찍 꽃을 피워내는 식물은 정말 도박꾼처럼 느껴지는데요. 가끔 꽃이 피었는데도 꽃샘추위로 눈이 와 꽃 위에 눈이 쌓인 모습을 목격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복수초, 앉은부채, 바람꽃류, 샤프란, 수선화 같은 식물들은 꽃샘추위에도 끄떡없습니다. 신진대사를 통해 스스로 열을 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주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는 바깥 온도보다 15~35도 높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온도는 꽃의 향기를 더 잘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 곤충들이 잘 찾아올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요. 게다가 추운 계절에 찾아온 곤충들은 이 따뜻하고 아늑한 곳을 좋아합니다. 앉은부채의 독특한 꽃 모양은 열기를 통해 주변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 효율적으로 향기를 퍼뜨립니다. 앉은부채의 뿌리는 매년 더 깊이 땅속으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겨우내 뿌리가 얼지 않고 더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능력이지요.
봄꽃이 아름다운 이유
이렇게 추위를 견뎌 낸 노력을 생각하면 봄꽃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산책을 나섰다가 꽃샘추위로 얼른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생각하다 바람이 더 시리게 느껴지는 이유였지요. 우리나라보다 추운 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봄꽃처럼 다시 피어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이번 봄이 예전처럼 평화롭길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