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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여왕님, 이들의 여왕님

  •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런던 사는 변호사의 뉴스 읽기 1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올해로 재위 70주년을 맞았다. 대영제국 및 영연방의 왕으로 산 세월이 70년째라는 의미다. 1925년 4월생이고 1952년 2월 만 25세에 왕이 되었다. 현재 95세다. 아버지인 조지 6세가 사망함으로써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여왕이 왕의 자리를 계승한 날은 선왕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동서고금 역사상 선왕의 사망이 그 다음 왕에게 늘 슬프기만 한 사건은 아니었던 일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여왕은 그 아버지와 평생 사이가 좋았다고 하니 승계 당일에 떠들썩한 기념행사는 없었다. 여왕의 재위 70주년, 즉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를 기념하는 행사는 대관식이 있었던 6월에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 나흘간의 축제가 기획되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공휴일을 하루 더 준다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기록 같지만, 엘리자베스 2세가 70년 이상 왕좌에 올라 있던 유일한 왕은 아니다. 무려 세 명이 더 있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루이 14세, 유럽의 작은 공국 리히텐슈타인의 요한 2세 그리고 2016년에 사망한 태국의 라마 9세가 그들이다. 이 중 제일 오래 왕으로 있었던 사람은 17세기에 태어나 만 4세에 왕이 되고 18세기에 만 76세로 죽었던 태양왕 루이 14세인데, 72년이 약간 넘는 세월 동안 왕으로 있었다. 여왕이 앞으로 넉넉잡고 3년을 더 왕으로 있어야 세계적으로 최장 재위 기록을 경신하는 셈이다.

영국 역사상으로 엘리자베스 2세는 2015년에 최장 재위 기록을 수립했다. 그 전까지 가장 오랫동안 군림한 왕은 여왕의 고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당연히 가장 오래 재위한 여왕이기도 하다. 여태껏 엘리자베스 여왕을 섬긴 영국 총리는 모두 14명인데, 즉위 당시의 총리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여왕의 결혼 70주년은 2017년에 있었다. 영국 왕가 역사상 가장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한 커플이다. 1947년에 그리스 및 덴마크의 왕자였던 필립 마운트배튼과 결혼했으니 73년간의 결혼생활이었다. 남편인 필립공은 작년 4월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코로나가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필립 공의 장례식은 당시 시행되던 엄중한 격리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여왕이 장례식장인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남편을 떠나보내는 모습은 전 영국 국민의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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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적 논란 중 하나인 소위 ‘파티 게이트’는 코로나 격리 지침이 여왕에서부터 일반 시민까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던 와중에 총리인 보리스 존슨 및 그 측근이 지침을 어기고 수차례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티 중 한 번은 필립공의 장례식 전날 벌어졌다는 것이 밝혀져, 장례식 당시 홀로 앉아있던 여왕의 모습과 대조되며 존슨 총리 및 그 측근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넘쳐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다. 영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에 해당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와중에 왕으로 즉위했다. 여왕 자신도 전쟁 중 운전수이자 트럭 정비공으로 복무했다. 현존하는 국가 원수 중 직접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브렉시트와 팬데믹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높아가는 와중에서도 여왕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신뢰와 애정은 각별했다. 다른 왕가 인물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말이다. 비록 여왕 본인은 남편과 긴 세월을 해로했지만, 그의 네 자녀 중 셋이 이혼한 경험이 있다. 특히 왕세자인 찰스가 현재 부인인 카밀라와 외도를 하고, 왕세자비인 다이애나와 요란하게 이혼을 하고, 다이애나가 난데없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결국 애인인 카밀라와 결혼하는 등의 사연은 초대형 스캔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왕위를 찰스가 아니라 찰스의 아들인 윌리엄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있었다. 만일 찰스가 왕이 된다고 해도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여왕이 최근 찰스가 왕이 되면 카밀라가 왕비라고 불릴 것이라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요즘 여왕님은 길고 길었던 치세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남편의 사망 이후 건강이 많이 약해진데다가 코로나에 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왕 사후 왕실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왕세자 찰스의 둘째 아들인 해리 왕자의 경우, 왕실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부인과 함께 절연했다. 찰스 또한 대표로 있던 자선기금이 돈을 받고 작위와 국적을 거래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의 경우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추문 끝에 미국에서 민사 소송의 대상이 되었으나 거액을 주고 가까스로 합의했다. 여왕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거국적 축제 분위기는 어느 정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영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된 국가이면서도 왕실 및 귀족의 존재를 인정한다. 즉, 한편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근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을 토대로 국가를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을 존속시키고 있는 독특한 나라다. 앞으로의 왕실과 영국 국민의 관계는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지만 일단, 여왕의 재위 70주년을 축하하고 만수무강을 빌어볼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든다. 여왕님이 없는 영국이란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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