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방시혁과 교황
- 영화 <두 교황>
- 글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참 많은 논쟁 속에 사는 기분입니다. 사건마다 다양한 의견이 대립합니다.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라면 오히려 낫습니다. 정답을 안다고 생각했을 때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전혀 다른 의견이 나의 정답을 지적할 때 고민이 커집니다. 나는 틀렸을까? 나의 답을 증명하기 위해 논쟁해야 합니다. 내 말이 맞는가, 상대방이 맞는가. 전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일수록 설득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때가 많습니다.
“형, 사람이 논리로 설득돼?”
BTS를 키운 하이브 방시혁 의장은 “사람은 논리로 설득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방시혁 의장은 JYP엔터테인먼트 수장 박진영과 출연해 이 같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이어 “옳다는 건 각자의 세계에서만 옳은 겁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얘기해 봤자 그 사람한테만 옳은 이야기거든요. 진영이 형은 맞는 말로 설득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저는 ‘맞는 말’이라는 기준 자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옳은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이 방송을 보고 난 뒤 떠오른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바로 <두 교황>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데요. 극단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교황의 대화로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교집합이 없는 생각을 치열하게 주고받으면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깊게 성찰하는 두 인물이 긴 대화를 나눕니다. ‘나와 생각 차이가 아주 큰 사람과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조금이나마 답을 줄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요.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善終)합니다. 새 교황 선출 과정이 진행되는데요. 그 결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앤서니 홉킨스 분)이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됩니다.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하는데요.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이 선출 과정을 거쳐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됩니다. 요약하면,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이 교황이 된 후부터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과 만나 대화하는 것이 주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총 세 번 만나는데요. 이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람의 성향 때문입니다. 두 교황은 극단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입니다. 종교관, 사상적 배경, 국적, 성격, 취미, 기호 등이 다르고요. 속한 파벌도 다릅니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는 요한 바오르 2세의 측근인데요. ‘20세기 최고의 가톨릭 신학자’로 첫 손에 꼽힙니다. 그는 타 종교와의 화합을 중시하면서도 정통 교리를 수호했던 요한 바오르 2세의 뒤를 이어 ‘보수파’를 이끌게 됩니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그 반대입니다. 빈민가에서 신도들과 함께 축구 경기를 응원할 만큼 친근하고요. 남미 특유의 해방신학을 대표하는 ‘개혁파’입니다. 첫 만남부터 둘은 다른 점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라칭거는 절차에 엄격합니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독일 출신인 그는 고향 바이에른 음식을 즐깁니다. 반면에 베르고글리오는 격식과 예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비틀스와 아바를 즐겨 듣고요. 가까운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합니다. 이러한 두 교황의 차이가 영화 내내 밑바탕에 깔립니다.
이 정도로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선 희망을 품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데요. 생각이 다르다면 갈등부터 예상합니다. 논쟁을 피하기 어렵죠. 무엇이 다른지 정확히 안다면 그 주제를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논쟁하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요. 두 교황은 논쟁을 선택했습니다. 논쟁 속엔 작은 희망이라도 있지만, 회피 속엔 희망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교황은 희망을 위해 용기 내어 만난 겁니다.
만났다면, 무엇보다 듣는 태도가 중요한데요. 두 교황의 두 번째 만남에서 그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두 번째 만남은 바티칸 스캔들로 어수선하던 2012년에 이뤄집니다. 이때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추기경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사임 원서를 들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을 찾아가는데요. 두 사람은 교황의 여름별장과 로마 교황청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며칠간 꽤 긴 시간을 함께 하게 됩니다. 이때 두 교황의 태도가 경이로운데요. 특정 종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약한 피부를 드러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둘은 권위를 내려놓습니다. 스스로 느끼는 죄를 완전하게 고백합니다. 껍질을 벗고 가장 나약한 내면을 드러냅니다. 이는 상대를 신뢰한다는 의미이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의견의 교환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가장 예민한 속살을 드러내는 일인데요. 교황이라는 권위를 벗어던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나누는 건 감정입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젊은 시절에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신부들의 납치를 막지 못했다는 걸 고백하는데요. 그것이 여전히 죄스러워 추기경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까지 한 겁니다. 이어 베네딕토 16세 역시 죄를 고백하죠. 특성 사건과 그 사건으로 느낀 감정을 나누면서 진정한 소통을 하게 되는데요. 생각, 위치, 입장 등이 다르더라도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겁니다.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생각을 한 것 역시 이 대화를 마친 후였습니다.
“타협 아닙니다. 나는 달라졌습니다”
대화 끝에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달라졌다고. 타협이 아니라고. 달라졌다는 건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의 생각과 같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생각은 여전히 강경하지만, 희망을 위해 다른 생각이 필요한 때라는 걸 받아들인 겁니다. 타협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극단적인 두 가지 생각의 중간 지점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위치를 내려놓기로 했죠.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 가장 개혁적인 결정을 하기에 이른 건데요. 이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의 논리적 설득 덕분이 아니고요. 베네딕토 16세가 진정으로 듣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장을 꺾으면, 비난받을 때가 많습니다. “너의 말은 틀렸어”라고 공격받기 쉽죠. 유명하거나 권위가 있다면 이 공격은 더 거세집니다. 그래서 의견을 바꾸는 건 어렵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용기를 낸 겁니다. 용기는 앞으로 나갈 때보다 뒤로 물러날 때 진가가 발휘되죠. 동시에 그는 타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상대와 진심으로 대화한 뒤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말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 간 접점을 찾아 적당히 받아준 게 아니라, 당신의 의견 덕분에 내 생각이 거듭났다는 뜻이죠. 이를 우리는 ‘경청’이라고 부릅니다.
만남 후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됩니다. 만나고, 진심으로 대화했다면 이동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묻습니다. “신께서 항상 이동한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답합니다. “이동하면서 찾아야지요” 그리고 두 교황은 월드컵 결승전을 함께 보며 투닥거리는 사이가 되죠.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이동할 줄 아는 인물들입니다. 이는 생각의 이동일 수 있고요. 권위의 이동일 수 있습니다. 감정의 교류일 수도 있죠. 어쩌면, 경청하고 이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희망을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인데요. 만나고, 대화하고, 이동할 때 그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웹진 <언론사람>이 이번 12월호를 끝으로
뉴스레터로 전환됩니다.
그동안 <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코너를 연재해주신 이성봉 기자님과
많은 사랑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4년 1월, 뉴스레터 <언론사람>으로
새롭게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