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視線)
익명의 탈 뒤에 숨긴 민낯
- 글 권희경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N단어(n-word)! N단어가 뭔지 아느냐? 그것은…핵단어(Nuclear word)”
“왜 미국에는 노르웨이 같은 선진국이 아닌 아이티나 아프리카 같은 똥통 나라들에서 이민자가 오는가?”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
모두 미국의 전직 대통령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 전후에 한 말입니다. 그는 여성, 아시안, 흑인 등 여러 소수집단을 서슴지 않고 비하했습니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 기관이나 정치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무례한 행동을 용인할 미국인은 거의 없으리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여론조사에서는 클린턴이 54%, 트럼프가 41%로 클린턴이 트럼프를 두 자릿수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트럼프의 당선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석을 했더니, 백인 유권자 중 58%는 트럼프의 편에 선 것으로 나왔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기록한 37%보다 21% 포인트나 더 많습니다. 백인 중에서도 크리스천의 트럼프 지지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합니다. NBC 뉴스가 선거 직후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복음주의 크리스천은 집계를 시작한 이래 트럼프 지지율이 최고 수치인 81%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5명 중 4명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것입니다. 백인 가톨릭 교인의 트럼프 지지율 역시 60%로, 같은 종교를 가진 히스패닉보다 34% 포인트나 높았습니다.
이런 명백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는 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요? 그 많던 트럼프 지지자들은 왜 선거 직전까지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애초에 설문조사에서 ‘실제로’ 누구에게 투표할지 솔직하게 답할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여론조사와 선거 결과 간의 괴리를 사람들이 ‘바람직하게’ 대답하고자 하는 성향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낳았는지는 빅데이터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라는 책에서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Seth Stephens -Davidowitz)는 빅데이터를 이용해 그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박사 과정에 있는 동안 특정 검색어 추세를 보여주는 ‘구글 트렌드’를 이용해 버락 오바마가 여론조사보다 손해 본 표가 4% 포인트 정도 많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전화 여론조사에서는 오바마에게 투표할 예정이라고 밝힌 흑인 상당수가 투표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습니다.
2017년 트럼프가 당선된 선거에서도, 저자는 트럼프 지지층이 평소 심각한 흑인 비하 단어인 ‘깜둥이(nigger)’ 검색 빈도가 높은 지역에 많다는 데이터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이라고 해서 설문조사원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흑인을 혐오하며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인터넷으로 흑인을 놀릴 만한 농담거리를 찾아보았을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유권자는 거의 없었기에, 여론조사 전문기관도 선거 결과를 제대로 예측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인종주의자가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만, 이 연구는 나중에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층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주변 사람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진실을 빅데이터는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경상도에 대한 혐오표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담대구’, ‘대프리카’, ‘머구’와 같이 풍자로 볼 수 있는 있는 표현들도 있지만, ‘신라도’, ‘4시’, ‘개쌍디언’, ‘흉노족’, ‘박퀴스탄’, ‘마사오그라드’, ‘문디스탄’ 등 전라도 혐오 표현에 대응되는 극단적 표현도 종종 보입니다. 혐오는 혐오를 낳기 때문이겠지요. 특정 지역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표현들은 결국 지역에 따라 나와 타인을 구분하고, 경계선을 긋게 만들어 결국 배타적인 정서와 행동을 낳게 됩니다.
인터넷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창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과장하여 선동하고 세력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난무하는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고 그 영향력은 더욱 우려스럽습니다. 지금도 소비자들은 유튜브 등 인터넷 콘텐츠를 소비할 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관심사에 부합하는 내용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이미 지역, 성별, 세대 등에서 양분된 우리 사회가 더 분절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닮아가는 것처럼, 미워하는 사람들도 서로를 닮는다고 합니다. 연구하는 사람이자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남은 과제는 혐오표현의 현황이나 개인에 대한 영향력을 살피는 데에서 더 나아가 혐오를 종결짓고 포용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혐오표현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래 기사 내용을 그 단서로 삼고 싶습니다.
증오는 원래 원시적 생존 본능에서 진화한 감정이다. 정글에서 뱀이나 사자를 만났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둘 중 하나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fight or flight). 도망치는 이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면, 싸우는 이의 머리는 증오로 달아오른다. 더 잘 싸우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고 근육이 움츠러든다. 더 잔혹하고 대담해진다. 도처의 위험으로부터 허약한 몸뚱이를 지켜내기 위해 고대인의 뇌는 전략적으로 ‘증오’를 가꿨다. 싸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증오는 동정과 연민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포용력을 차단한다. … 연민 없는 증오가 고개를 쳐드는 것은 주로 생존의 위기를 만날 때다. 21세기의 도시에서라면 일자리를 잃거나 채무에 시달리는 이가 많아질 때, 집단의 증오지수 또한 올라갈 테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몰락한 자영업자와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전쟁을 겪듯 살아가는 빈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좌절과 분노 위에서 파시즘은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파시즘이 언제나 증오의 대상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는 점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증오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다.
- <한겨레신문> 2014.03.04. 「혐오에 찬 너의 말...그게 인종주의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는 생존을 위한 공포가 없을 때 싹튼다는 데 동의합니다. 온라인 상에서 혐오표현을 하는 이들이 익명의 탈 뒤에 숨긴 민낯은 어쩌면 혐오와 증오가 아니라 좌절과 공포가 아닐까, 승자독식,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무한 경쟁 사회가 혐오표현을 생산해 내도록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이 늦었지만 가장 빠른 때일지도 모릅니다.
※ 이 글은 “지역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사회과학대학 기초학문 교류 및 토론을 위한 2023년도 영호남 국립대학 학술대회>에서 토론한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