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초능력이 없어도 빛날 수 있습니다
- 드라마 <무빙>
- 글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스타트업을 취재한 지 3년이 넘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능력자를 만났습니다. 능력자들은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없던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동네 음식을 어디서든 쉽게 배달해 먹을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고요. 원하는 상품을 오늘 주문하면 내일 현관문 앞에 가져다 놓는 사회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번호표를 뽑지 않고도 스마트폰 하나로 예·적금, 대출, 주식 등 금융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능력자들이 널린 곳에 왔을 때 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서 세상을 흔들겠다는 비전으로 야망을 내뿜는 사람을 보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착각했죠. 나도 저런 능력이 있지 않을까? 아직 발견을 못한 게 아닐까? 나도 능력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능력자들과 가까워질수록, 관찰할수록 그들의 능력과 제 능력의 차이가 크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드라마 <무빙>을 봤습니다.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인데요. 초능력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다양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능력(비행능력), 모든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능력(초재생능력), 건물을 부술 정도로 강한 괴력,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 수천 배 예민한 오감(초감각능력) 등이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이야기인데요.
많은 초능력자 사이에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원고등학교 교사 최일환(김희원 분)입니다. 작품 속 국정원 요원들은 대부분 전투에 활용 가능한 초능력을 갖고 있는데요. 최일환은 특별한 전투 능력이 없습니다. 전혀 강인한 모습도 아니고요. 정원고 학생들의 초능력이 드러날수록 그의 능력은 더 평범하게 느껴집니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전투력이 없다는 점에서 나약하게 느껴지는 장면도 많죠.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잠시 설명하자면, 그는 육군 특전부사관 출신인 국정원 요원입니다. 정원고등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한데요. 정원고는 국정원에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능력자 학생 3인방인 김봉석(이정하 분), 장희수(고윤정 분), 이강훈(김도훈 분)이 다니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죠. 최일환은 이들의 담임 선생님입니다. 학교에서 체대 입시라는 명목으로 능력 있는 학생들을 국가 인재로 육성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초능력이 없는 사람
그가 눈에 들어온 건 초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초능력자를 발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학생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요.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가능성이 보이면 테스트합니다. 그리고 육성합니다. 훈련을 통해 능력을 극대화하고 목적을 이루고자 합니다. 희수의 신체 능력을 알아보고 체대 입시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희수는 초재생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능력이죠. 최일환은 눈으로 확인하진 않았지만, 몇 가지 테스트를 통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배우 김희원은 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연기한 최일환 캐릭터에 대해 “저만 초능력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다른 인물들이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능력과 비교하면 능력이 없긴 한데요. 그에겐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이기도 하죠. 초능력자와 평범한 사람 중간에 자리 잡고 있기도 한데요. 작품에서는 이를 ‘경계인간’이라고 부릅니다. 특정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고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경계선에 서 있다는 점에서 저는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창업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독자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요. 스스로 경계인간이 되는 순간이 많습니다. 훌륭하게 사업을 하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나 능력자들이 모여 있는 회사를 찾아내 독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데요. 늘 능력자들을 찾아다닌다는 점에서 최일환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또한,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에 최일환처럼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이죠.
인간을 수단으로 보지 않는 사람
한 가지 더 꼽자면, 최일환은 휴머니즘이 탑재된 사람입니다. 휴머니즘(humanism)은 인문주의, 인본주의라고 번역되는데요.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면서 인간이 목적이 되는 이론 혹은 인간의 능력, 성품, 소망, 행복 등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거나 반대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는 등장부터 그랬습니다. 국정원에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장주원(류승룡 분) 때문이었는데요. 북한과 교전 중 최일환에게 날아오는 총알을 장주원이 팔로 막아준 적이 있습니다. 장주원이 국정원 요원이라는 걸 알게 된 최일환은 자신도 국정원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죠. 그는 국정원 첫 출근 날 이렇게 말합니다. “8년 전 강릉에서 전우가 옆에서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국정원 요원이 저희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분들께 한 팔의 도움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자를 돕고 싶다는 말이죠.
이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대사 중 하나가 ‘수단’입니다. 빌런들이 주로 내뱉는데요. “저놈은 그저 수단일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권력을 목적에 두고 사람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거죠. 최일환은 이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국정원에 들어간 이유가 애초부터 ‘사람을 돕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적이 사람인 겁니다. 이는 드라마 후반부 최일환이 국정원 사람들과 대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소하게 빛나는 사람
최일환을 통해 제가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인간적인 능력자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마음이 갑니다. 한 특별한 창업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는 돈을 아주 잘 벌 수 있는 사업모델을 찾았지만, 사회적으로 해를 주거나 나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모델을 폐기했습니다. 그 창업자는 해당 모델로 돈을 벌어 건물을 사고, 한강뷰 아파트를 사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죠.
이후 그의 회사는 고생 끝에 수백억 원을 투자 받았고요. 직원 수 100명이 넘는 규모로 컸습니다. 매출도 수백억 원에 달하죠. 사회에 건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로 잘 성장했습니다. 이 창업자는 인간이 목적인 회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구분되는 능력자였습니다. 저는 경계인간으로서 이러한 인간적인 능력자를 보면, 경외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과 같은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닫죠. 마치 <슬램덩크> 송태섭이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을 보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일환은 그런 경계인간들을 위로하는 캐릭터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가 강백호나 초능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을 날지 않아도, 힘이 아주 세지 않아도, 상처가 1초 만에 회복되지 않아도, 오감이 특출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최일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고요.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 또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약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도 능력이 됩니다. 사소한 능력이더라도 나만의 능력이 있다면 빛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드라마 <무빙>의 최일환에게 위로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