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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일상을 춤추게 하기
- 영화 <패터슨>

  •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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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필자 제공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기자가 된 후로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질문하는 분들 대부분 업무를 위한 글보다는 에세이, 소설, 시, 편지, 영화 리뷰처럼 생각이나 감정을 담는 글에 대해 묻습니다. 문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문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몇 가지 조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선 되묻습니다. “글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글을 써보지 않은 분들은 이 질문에 대부분 답하지 못합니다. 글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한데요. 글 자체에만 집중하면 이야기를 놓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아들, 엄마도 글 좀 잘 쓰고 싶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도 글을 잘 쓰고 싶다면서 방법을 물으셨죠. 보통 글을 전혀 안 써본 분들이 글 쓰는 법에 대해 물으면 ‘이야기’를 찾으라고 말하는데요. 더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 분들께는 ‘일기 쓰기’를 추천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께도 일기부터 써보시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거죠. 그랬더니 어머니는 “매일매일 특별한 일이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써. 매번 같은 내용만 쓸 수는 없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갈 때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패터슨>입니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잔잔한 일상이 담긴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패터슨이라는 남자의 일상을 따라가는데요. 부인 ‘로라’와 애완견 ‘마빈’과 함께 살면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버스 기사입니다. 그의 일상은 아주 단순해요. 아침에 거의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시리얼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고, 버스 안에서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퇴근합니다. 기울어진 우편함을 똑바로 고정하고요. 아내와 저녁을 먹고, 마빈과 저녁 산책을 하죠. 단골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맥주잔을 바라보면서 그의 하루는 끝이 납니다.

화요일에는 이렇습니다. 일어나서 시리얼을 먹고, 출근하고,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퇴근하고, 우편함을 고정하고, 저녁에 산책하고, 단골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비웁니다. 수요일도, 목요일도, 금요일도, 같은 일상이 반복됩니다. 무슨 영화가 이래?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 영화의 매력은 특별하지 않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패터슨은 같은 일상을 반복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일이 발견됩니다.

어느 날, 패터슨은 로라와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날 이후 패터슨은 내내 평소에 보이지 않던 여러 쌍둥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수많은 쌍둥이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그 쌍둥이들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비슷한 일상을 살았을 겁니다. 다만 패터슨이 ‘의식’하지 못했던 거죠. ‘의식’은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느끼거나 특별히 염두에 둔다는 뜻입니다. 패터슨은 그날 쌍둥이를 특별히 염두에 두어 두드러지게 느꼈습니다. 그러자 쌍둥이들이 패터슨의 일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어제와 같은 일상 사이에 ‘쌍둥이’이라는 새로움이 발견된 겁니다. 새로움이 발견되면, 어제와 완벽히 같은 날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를 의식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와 다른 오늘을 보내게 된 셈인데요.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우리의 하루도 어제와 다르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흔히 직장인들은 점심 먹는 게 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날 하루 새로움을 찾는 일이죠. 어제와 다른 날로 이끄는 게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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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패터슨은 택시나 차를 타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시락 가방 하나를 들고 매일 걸어서 출근합니다. 퇴근 후 반려견 마빈과 산책하고요. 동네를 다닐 때도 늘 걸어 다닙니다. 이는 패터슨이 세상과 마주하고 소통하기 위함입니다. 걸을 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죠. 햇빛의 움직임, 머리칼을 치는 바람, 기온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길거리 아이들의 수다, 건물에 오가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 어제는 있었지만 오늘은 사라진 벽의 전단들을 보면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매일 변하고, 사람의 감정과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니까요. 비가 온 직후라면 무지개를 만날 수도 있죠. 걷기는 일상을 만끽하는 방식인 겁니다.

이건 ‘관점’의 차이일 겁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는가? 패터슨의 일상이 비슷해 보이지만, 매일 다른 이유는 ‘시’인데요. 패터슨은 노트를 지니고 다니며 틈틈이 시를 씁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로 채워져 아름다운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언뜻 보면 패터슨이 무기력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로 삶에 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그는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일상을 관찰하고요. 기록하면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시에는 ‘운율’이라는 게 있는데요. 반복 속에 운율은 리듬을 만듭니다. 우리의 일상을 ‘시’라고 생각하면, 일주일은 7개의 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매일 반복되는 것 같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보면 운율이 생기고, 운율은 리듬을 만들기 때문에 삶의 활력을 줄 수 있습니다. 일상을 춤추게 하는 거죠. 패터슨은 ‘시’를 쓰면서 감정적인 춤추기를 매일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겁니다. 오늘의 춤이 어제의 춤과 다르기 때문이죠.

제가 어머니께 ‘일기’를 써보라고 이야기한 건 단순히 글쓰기를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말하죠. 그건 일상이 더는 새롭지 않기 때문인데요. 대부분의 경험이 익숙하므로, 어제와 오늘을 다르게 느끼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패터슨의 일상에서 보듯이 그건 관점의 차이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오늘의 감정을 되짚어 보면 어제와 다른 일상을 보는 관점이 생깁니다. 관점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패터슨은 일상에서 시상이 떠오르면 바로 써 내려가는데요. 그가 운전하는 모습과 쏟아지는 폭포가 겹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가 일상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는지 보여주죠. 평범한 하루 안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건데요. 일상의 경험이 어떻게 예술로 바뀌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글을 쓴다는 건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아니고요. 매번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일상이 잠시 낯설게 느껴질 수 있어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인 일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패터슨>은 생각보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어제는 타지 않았던 쌍둥이가 오늘은 버스에 탄 일, 어제 벽에 붙어 있던 전단이 사라진 일, 길을 걷다가 시를 쓰는 아이를 만난 일, 폭포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일, 세탁소에서 랩(Rap)하는 사람을 우연히 본 일, 오늘따라 빨리 해가 지는 것처럼 느낀 일. 이런 사소한 일을 시로 적는데요. 예술가는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자격증은 없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신춘문예를 통과할 필요도 없습니다. 글을 쓰는 건 언제나 감정을 담는 일이고요. 저는 예술이 삶의 감정을 넉넉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데요. 패터슨의 버스 노선처럼 늘 같은 경로를 반복하는 일상일지라도 그 버스에 탄 사람들의 감정은 같았던 적이 없습니다. 감정이 다르면 글도 달라집니다. 고유한 이야기가 담긴 글은 모두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고요. 글을 쓴다는 건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일입니다. 삶의 리듬이 생기니까요. 그날 일상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