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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視線)

용서의 과학

  • 권희경 (언론중재위원회 부위원장/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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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로미어(Telomere)는 그리스어로 ‘끝’을 의미하는 텔로스(Telos)와 ‘부위’를 의미하는 메로스(Meros)의 합성어로,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양쪽 끝단에 있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유전자를 운동화 끈에 비유한다면, 운동화 끈의 올이 풀리지 않도록 마감된 끝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염색체의 끝에서 DNA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텔로미어는 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세포분열을 하는 과정에서 염색체 끝부분은 완전하게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세포분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결국 텔로미어는 점점 짧아지고 소실됩니다. 이것이 세포의 노화로 직결되고, 암 등의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므로 텔로미어를 길게 유지하는 것은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텔로미어를 길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식사, 충분한 수면, 운동과 함께 스트레스 없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최근에는 텔로미어의 길이와 감정이 관련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분노, 공포, 불안 등을 강렬하게 느끼거나 감정 조절 불능 상태에 빠지면 텔로미어가 빨리 닳아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감정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보면 당연한 현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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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세포 타이머’ 되돌린다고 불멸의 삶이 올까」

조정 심리에 참석하는 신청인과 피신청인은 대부분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습니다. 신청인은 보도의 취지나 사실관계 왜곡, 정신적·물질적 피해에 대한 원망이 있고, 피신청인 측은 언론의 자유와 사명이 제한될 수 있다는 데 대한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드물지만 심리에서도 서로 간에 고성이 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텔로미어가 빨리 닳는 것을 막기 위해 피신청인이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처신이 ‘사과’라면, 신청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행동은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전적으로 ‘지은 죄나 잘못을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과학보다는 심리학, 심리학보다는 종교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심리학에서 용서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양한 심리학적 주제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용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용서 연구의 선구자인 ‘에버렛 워딩턴(Everett L. Worthington)’ 교수는 성인남녀 2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용서를 거부한 사람들은 분노와 두려움이 많았고 이에 따라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면역 기능이 떨어지며 심혈관 관련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최근에는 용서가 분노, 좌절, 불안 등을 완화함으로써 텔로미어의 길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여러 과학적 연구에서 용서를 받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용서를 하는 당사자에게도 위로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에 관해 평생을 연구한 에버렛 워딩턴 교수도 어머니가 강도 살인을 당했을 때, 자신이 용서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고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피살 장면과 현장의 피가 계속 머릿속에 그려지고, 분노에 치밀어 잠이 들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개인과 부부의 용서를 돕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왔으면서도 자신에게 닥친 비극 앞에서는 그 지식과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증오와 싸우다 지쳐 용서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더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용서하고 싶다’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작용했습니다. ‘용서할 수만 있다면 마음이 평안해질 텐데’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범인을 용서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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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누군가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저에게 보낸 문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그 무례함과 뻔한 거짓말을 폭로하고 싶었고, 언짢았던 마음이 당연한 것임을 동의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용서’에 대한 글의 초안을 잡고 고쳐 쓰던 중이라는 것은 아예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며칠을 곱씹고 하소연을 하다 보니, 직접 제 감정을 얘기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쓰고 있는 글 주제가 ‘용서’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비난과 하소연을 그만두는 것이 무슨 용서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용서의 대가가 한 말에 기대기로 했습니다. 워딩턴 교수는 “용서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이봐, 사는 게 그렇지. 넘어가는 거야’ 하면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어난 일을 용납하고 정당화하거나 혹은 신에게 넘기는 것이다. ‘나는 그냥 신이 그 사람들을 혼내도록 놔두겠어’ 혹은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신에게 맡기겠어’라며 넘기는 것이다.”라고 했지요. 저는 첫 번째 방법의 용서를 실천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결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지쳐 용서라는 결정에 이르는 것이겠지요. 이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에 대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습니다. 이는 언론조정 사건의 당사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가왕 조용필의 노래 ‘Q’의 가사 일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그 어떤 명언보다 용서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로미어를 덜 닳게 해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이기적인 인간에게 용서의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덜고 평안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어렵지만 되뇌어 봅니다.

“나를 위해 당신을 용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