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視線)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세요
- 글 권희경 (경남중재위원/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언론조정 과정에서 서로 입장이 다른 신청인과 피신청인을 설득해 보도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조정의 큰 틀에 합의하고 나면, 어떤 내용으로 정정보도나 반론보도를 할지 세부적인 문구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때, 신청인은 사실과 다른 부분을 조목조목 바로잡거나 신청인의 입장을 최대한 상세하게 보도할 것을 요청하곤 합니다. 보도로 인해 받은 피해, 억울한 마음을 모두 담고 싶은 것이지요. 반대로 피신청인은 되도록 원론적으로, 짧게 보도하기를 원합니다. 보도에서의 오류나 과실을 인정하더라도 보도의 취지나 방향성에까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보도 문구를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를 두고 때로는 조정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제가 생각하는 것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입니다. 아마 이 글 제목을 보시고 대부분 ‘그게 무슨 말이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니’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코끼리를 그려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위의 책을 읽은 분들은 제외하고요.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가 쓴 이 책의 첫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버클리 대학에서 ‘인지과학개론’이라는 수업을 진행하며 프레임 연구를 강의할 때, 맨 처음 일은 학생들에게 한 가지 과제를 내주는 것입니다. 그 과제는 바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요, 말 그대로 무슨 일을 하든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 과제에 성공한 학생을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단어들이 그렇듯 코끼리도 그와 상응하는 프레임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어떤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종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코끼리는 몸집이 크고, 퍼덕이는 귀와 엄니와 긴 코를 가지고 있고, 밀림에 서식하고, 서커스와 연관되어 있습니다.(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와이즈베리, 2018)”
즉, 사람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를 원하면서 그 사안을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안을 상기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지요. 코끼리가 상징하는 미국 공화당의 사례를 예로 들면, 민주당에서 공화당의 어떤 정책 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밝히면서 지적할수록 오히려 국민들에게 공화당의 정책을 알려주는 효과가 있고, 민주당은 존재감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불법 침입과 도청 시도를 은폐하려 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한창 탄핵 압력을 받던 때 닉슨은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고자 기자회견에 나섰는데, TV에 중계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 그러나 이 발언은 TV 시청자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극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입에서 직접 나온 ‘사기꾼’이라는 단어만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레이코프는 닉슨의 사례에 대해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 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프레임의 기본원칙을 가르쳐 준다”고 지적했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의 인지습성을 간과했다는 말이지요.
저는 이런 ‘코끼리’ 효과가 언론조정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론보도이든 정정보도이든, 그 내용이 상세하고 길수록 언론 소비자의 눈길을 끌게 되고,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자세할수록 그것이 주는 각인 효과도 클 수 있습니다. 원래는 관심이 없던 기사이지만 한 번 더 찾아보게 될 수도 있겠지요. 더 나아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알려왔습니다’라는 문구는 ‘혹시 다른 관계는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도 있고,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적법하게 결정되었습니다’라는 문구는 ‘위원회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 간의 입장이나 사안에 따라 조정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어딘가 모르게 조금 미흡하다고 여겨지는 선이 어쩌면 최선일 수도 있다고 하면 그건 저의 억지일까요.
얼마 전 제가 중재위원으로 참여한 언론조정 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부적인 사실관계에서는 보도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지만, 보도의 취지나 취재원의 주장은 의미가 있어 보이는 보도였습니다. 신청인 측은 언론사 측이 취재 과정에서 관련 법령을 확인하지 않아 잘못 해석된 세세한 사항을 모두 정정보도문에 담고 싶어 했지만, 피신청인 언론사는 대표적인 사항만을 반영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코끼리 사례’를 들면서 신청인 측을 설득해 보았지만, 결국 신청인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된 문구로 정정보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정정보도문을 접한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레이코프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