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낯설게 하는 장면들
나와 다른 모양인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
-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글 이성봉 (아웃스탠딩 기자)
“당신과 나는 달라요”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면서 들었던 말입니다. 저는 처음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당신을 배척하는 말인가요? 폭력적인가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보다 따뜻한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존중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 단 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과 상식이라는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선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사랑은 비정상이라는 뜻입니다. 정상의 테두리를 만드는, 그 사회의 기준으로 볼까요? 여기 '비정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 못 하는 여자 청소부, 인간이 아니면서 괴물처럼 징그러운 생명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돈이 안 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동성을 사랑하는 할아버지까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이 사랑을 나누면 ‘비정상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속 존재들입니다. 그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모두 정상이 아닙니다. 백인이자 남성이며 이성애자이고, 4인 가족을 꾸린 중산층이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는 그렇습니다. 영화에는 흑인이나 장애인, 동성애자나 괴생명체 같은 '비정상'이 대다수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들이 '정상'이라는 테두리를 거부하고 '비정상'이 없는 낙원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1960년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미국 항공우주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는데요. 비밀실험실을 청소하던 중 수조 안에 있던 괴생명체를 발견합니다. 그 생명체는 물고기와 인간 남성을 섞은 모습입니다. 엘라이자는 그 괴생명체가 수조에 갇힌 채로 잡혀온 후 보안책임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탈출시키려 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사회는 앞서 언급한 ‘정상’이라는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정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스트릭랜드입니다. 1960년대 미국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 백인 남성이죠.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비장애인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엘리트이기도 하죠.
엘라이자는 비정상 집단에 속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고,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비정상’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동료 청소부인 ‘젤다’는 흑인이면서 여성이고요. 엘라이자의 이웃인 ‘자일스’는 백발노인이면서 동성애자입니다. 센터에서 연구하는 ‘드미트리’는 러시아 태생의 외국인이죠. 이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스트릭랜드의 대사로 명확해집니다. 그는 젤다에게 "신은 당신보다 내 모습에 더 가깝게 생기셨지"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비정상’이라고 경계선을 긋는 겁니다.
비정상 집단은 정상 집단에 의해 탄압당합니다. 영화에서 이를 깨부수는 것은 ‘물’입니다. 물은 곧 사랑을 의미하죠. 엘라이자는 욕조에 물을 담고 매일 아침 자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이후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지는데요. 두 사람은 목욕실 전체를 물로 가득 채우고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에 빠진 엘라이자는 버스 창문에 맺힌 물을 보면서 사랑을 나눴던 때를 회상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들의 사랑이 단단해질수록 정상 집단에 대항할 힘이 생깁니다.
이 영화에서 물은 그 어떤 경계선도 지우는 힘이 있습니다. 물로 표현되는 사랑은 모든 생명체 간 경계를 허문다는 의미로 이 영화에서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나눌 수 있고요. 물이 어떤 모양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 또한 그 형태를 특정할 수 없죠. 비정상 집단도 정상 집단처럼 자신들만의 형태로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델 토로’ 감독은 영화 속 물에 대해 “물의 모양이 사랑의 모양입니다. 물과 사랑은 모양이 없잖아요. 필요한 대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취합니다. 물과 사랑은 장벽을 허무는 힘을 지녔고요. 또 유연합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경계선을 지우는 영화가 또 있는데요. 영화 <그녀(Her)>입니다. 인공지능(AI) 운영체제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인데요. 이 영화 역시 다양한 모양의 감정을 말합니다. 사랑은 생명체만 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사랑을 AI가 다 만족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AI와 사랑에 빠진 남자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만듭니다. 또한, "사랑은 사회가 인정하는 미친 짓"이라고 언급하며 사랑의 형태를 다양하게 보여주는데요.
특히 여러 형태의 성관계를 언급합니다. 영화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관계를 언급하고 배치하여 주의를 환기합니다. 남성끼리의 관계, 온라인에서 알게 된 존재와의 관계, 인공지능 사만다와의 관계 등 여러 형태로서의, 모양으로서의 성관계를 재고하려는 장치입니다.
이보다 더 나아간 영화가 <경계선>입니다. 앞서 언급한 ‘정상’ 범위에 아무것도 해당하지 않는 인물들이 사랑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아닌, 기형적 외모를 가진 ‘트롤’이 주인공이죠. 트롤이라고 하는 극단적 소수자의 사랑을 다룹니다. 그러면서 남성과 여성, 미남성과 여성, 미(美)와 추(醜), 자연과 문명, 국경과 국경, 인간과 비인간,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자신과 타자, 본능과 이성 등 모든 경계를 부숩니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합니다. 사랑이라는 물을 뿌리자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즉, 사랑을 앞에 두면 모든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셰이프 오브 워터>는 언어장애 여성과 괴생명체의 사랑이라는 ‘비정상’의 관계를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 흐릿하게 하면서 그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형태가 없다는 건, 결국 그 형태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에게 사랑은 그런 겁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정상'을 탈피하는 것을 넘어 인간적 '정상'도 없는 것. 정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생각지 못한 여정이 시작될 수 있는데요. 영화는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여정 그 자체가 사랑이고,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 여정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못해 자꾸만 기준을 만들고 위안을 얻고자 했을 뿐입니다.
물이 그렇습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더 그렇습니다. 이들 중 그래야만 하는 모양은 없습니다. 물의 형태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폭력이 시작됩니다. 사랑도, 삶도, 인간도. 물론 경계선을 지우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경계선을 지운다는 게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데요.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안한 존재입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고 형태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불안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지는 순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이 영화는 시(詩)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물과 사랑과 삶의 무정형을 반추합니다.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뿐.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고, 내 마음을 겸허하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