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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視線)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권희경 (경남중재위원/창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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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말하라.”
“둘째, 갈등의 원인이 ‘내’가 돼서는 안 된다.”
“셋째, 갈등을 해결한 대책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갈등 해결 스토리텔링의 지침으로 손꼽히는 세 가지 원칙입니다.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본 경험이 문제해결과 스트레스 관리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러한 경험을 묻는 것은 대학교 입학이나 채용 면접의 단골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도 당연히 함께 확산되고 있는데, 대부분 같은 원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침에는 적어도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갈등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생한다. 둘째, 갈등의 원인이 ‘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갈등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20년째 대학에 몸담고 학생들에게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을 주제로 강의를 해 온 저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세 전제에 대해 모두 ‘아니’라고 답변을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갈등은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상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식사 메뉴로 짜장면을 먹을 것이냐 짬뽕을 먹을 것이냐와 같은 내적 갈등부터, 정치적 입장에 대한 외적 갈등까지 다양한 갈등을 늘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갈등은 특정한 상황이나 사안을 두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갈등 상황에는 개인적인 주관이나 입장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복지의 원칙을 선별주의로 하느냐 보편주의로 하느냐에 대한 입장은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내’가 취하는 입장이 분명할수록, 그리고 주장하는 바가 명확할수록 다른 입장에 있거나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확률이 높습니다. 황희 정승처럼 ‘너도 옳고, 저도 옳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중립을 지키고 갈등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이기 보다는 그 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꼭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고 합의점을 찾아 결론을 도출하느냐 하는 것이므로, 갈등을 피하는 것이 상책은 아닙니다.

셋째, 갈등은 일상 속에 상존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관리’해야 할 요소입니다. 중세와 근대 사회를 전통 사회라고 할 때, 전통적으로 갈등이란 ‘나쁜 것’이며 ‘집단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갈등이나 충돌은 일종의 “집단의 병”이며, 그 집단을 이끄는 사람들의 가장 주된 책무는 갈등의 요소들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등은 어떠한 경우에도 좋을 수가 없으며, 분열의 근원이 된다는 게 오랫동안 내려온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후기 산업사회적 특성이 나타나면서,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문제로만 여겨졌던 ‘갈등’을 이제는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입장이 다르다면, 그 다른 생각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갈등은 부정적인 현상이지만, 어쨌든 갈등의 발생 자체를 막기는 어렵고 막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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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별다른 갈등이 없는 집단의 특성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갈등이 없는 집단이 겉보기에는 조화롭고 평온하며 협동적이어도 사실은 정적이고 무감동하며 보수적인 한편 개혁을 싫어한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갈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갈등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요, 집단 소속감과 응집성을 촉진하고 욕구불만의 탈출구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관점이 나타났습니다.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갈등은 혁신적인 사고와 비판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창의적이고 변화 지향적인 생동감 있는 집단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갈등을 억압하고 원천 봉쇄하여 문제가 되는 북한이나 독재 국가의 상황이 역설적으로 갈등의 순기능을 증명한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관리과학(Management Science)이 등장하면서 "갈등관리"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갈등관리란, 갈등을 일정 수준으로 관리함과 동시에 갈등 수준이 지나치게 낮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자극을 제시하거나 어느 정도의 갈등 요소를 투입할 필요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동질감이 심해서 정체된 것으로 보이는 부서에 일부러 이질적인 구성원을 배치하는 식입니다. 동일성만을 추구하는 집단에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정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양성의 확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갈등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역동성을 높이고 위기 대처 능력과 변화를 촉진하는 순기능도 할 수 있습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단어는,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조합한 것입니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모두 덩굴을 감으며 자라는데, 그 방향이 서로 달라 얽히면 아주 풀기 어려운 모습이 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두 나무 모두 질겨서 자르기도 어렵고, 뿌리까지 뽑기도 힘들다는 점에서 개인이나 집단 간의 의견충돌 및 마찰에 비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일조한 3대 임금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입니다.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라는 한시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뀐 구절이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정몽주의 단심가와 함께 묶여서, 유연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거나 또는 일편단심을 흔드는 내용이라고 평가되는데, 저는 이것을 갈등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칡과 등나무가 얽히더라도 서로를 말려죽이지만 않는다면, 산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칡과 등나무는 모두 오른 감기를 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얽히고, 두 나무가 한 곳에서 같이 자라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결국 햇빛을 받아 성장하려고 하는 목적은 같은 것이지요.

우리도 갈등을 역동과 변화를 위한 원동력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그래서 대입이나 채용 면접에서도 갈등을 해결한 경험을 물어보기보다는 좀 더 입체적으로 갈등을 보는 관점, 경험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언론 갈등에 비추어 본다면, 언론은 소신을 갖고 사실관계에 입각해 보도를 하고,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피해나 다툼이 있다면 서로 소명하여 조정을 하면 될 것입니다. 분쟁이 두려워 언론의 자유를 미리 제한할 필요도, 피해를 입었는데도 이를 감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론 보도를 둘러싼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것, 그것이 언론중재위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