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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관찰자의 일기

식물을 돌보는 곰팡이

  •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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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스에 빠진 씨앗

씨앗을 발아시키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양분, 온도, 수분 등에 따라 새싹이 나는지, 잘 자라는지 등을 관찰하는 실험인데요. 이 실험에는 락스를 쓰는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처음 실험을 배울 때 화장실 청소에 흔히 사용하는 락스와 새싹이 무슨 상관일까 했습니다. 살균제이자 표백제인 락스는 실험이 끝나면 실험 도구를 씻을 때 사용하는 것이기에 늘 실험실 싱크대 아래 놓여있었죠. 그런 세제가 실험대 위로 올라온 게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실험에는 대부분 고도로 정제된 실험용 약품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실험 설명서를 읽다가 락스에 직접 씨앗을 넣는다고 적혀있는 걸 보곤 당황스러웠죠. 설명서에 따라 씨앗을 락스에 넣으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독한 락스 때문에 오히려 씨앗이 죽는 건 아닐까 했지요.

환영받지 못하는 곰팡이

씨앗을 락스에 넣는 이유는 곰팡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곰팡이가 존재합니다. 씨앗 표면에도 곰팡이가 있지요. 정확한 실험을 위해서는 실험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통제해야 하는데 곰팡이도 그 중 하나입니다. 원하지 않는 곰팡이가 번져 씨앗 발아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씨앗 표면에 있는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씨앗을 락스에 담갔다 빼는 것이죠. 살균된 증류수에 락스를 씻어낸 후 마찬가지로 살균된 흙이나 영양 성분에 씨앗을 심어 관찰합니다. 락스는 곰팡이 외에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도 제거해 주죠. 그 다음은 씨앗을 심은 병을 살균된 곳에 두고 새싹이 날 때까지 며칠 동안 관찰합니다. 그렇게 씨앗부터 씨앗을 키우는 장소까지 모두 살균했지만 곰팡이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지요. 예상치 못한 하얀색, 초록색, 노란색 등 다양한 곰팡이가 퍼져나가곤 했습니다. 곰팡이가 핀 모습은 실험의 실패를 유쾌하지 않게 알려주는 지표였지요.

곰팡이은행이 된 종자은행

씨앗 발아 실험에서 곰팡이로 인해 실패를 맛봤을 때 저는 락스로 살균하는 시간이 충분치 못했거나, 실험하는 과정 중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오염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실험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어떤 곰팡이들은 씨앗의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자은행은 식물의 씨앗을 보관하는 곳인데요. 세계에서 가장 큰 종자은행인 영국 밀레니엄 종자은행에서 특별한 조사가 있었습니다. 씨앗을 깨트려 그 내부의 곰팡이를 살펴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단 6종의 식물에서 약 200종의 곰팡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4만 종이 넘는 식물 씨앗이 보관된 이 은행에는 얼마나 많은 곰팡이가 함께 보관되어 있을까요? 저는 예전에 곰팡이은행이 있는 실험실에서 연구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래서 이 발견 소식을 듣고 종자은행이 씨앗을 보관하는 은행인 동시에 곰팡이은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 안에 숨은 곰팡이가 의도치 않게 잘 보존되고 있다니 재미있었죠. 종자은행은 식물 종(種) 보전을 위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종자은행이 있지요. 그 많은 씨앗에 숨어있을 더 많은 곰팡이를 상상하니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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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팡이가 보관된 시험관과 페트리 디시 ⓒ필자제공

지구의 거대한 구성원, 균계

씨앗 발아 실험 외에도 여러 실험에서 살균을 통해 곰팡이를 없애기 바빴던 제게 곰팡이는 환영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곰팡이에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버섯, 효모처럼 이로운 곰팡이도 있지만 대체로 질병을 일으키거나, 더럽고 상한 곳에 피어난 모습을 떠올리죠. 그러나 식물, 동물과 달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곰팡이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곰팡이에 대한 교육, 연구는 식물과 동물에 비하면 매우 부족하지요. 그에 반해 곰팡이 종(種) 수는 무척 많습니다. 현재 지구에 있는 식물을 35만 종 정도로 추정하는데 곰팡이는 최소 220만 종에서 최근엔 620만 종까지 추정합니다. 그렇게나 많은 종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 곰팡이는 어떤 존재일까 새삼 궁금해지지요. 그러나 곰팡이의 90프로 이상이 아직 조사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미시간주의 한 숲속에는 나이가 2,500년 된 거대곰팡이, 아르밀라리아 갈리카Armillaria gallica가 살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개체가 균사 형태로 흙 속에 퍼져있는데 그 무게가 약 400톤으로 추정되죠. 이는 지금까지 지구에 존재했던 동물 중 가장 거대한 동물인 대왕고래보다 두 배 이상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구에서 가장 큰 식물, 가장 큰 동물, 가장 큰 공룡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이렇게 거대한 곰팡이는 생소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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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자를 퍼뜨리기 위해 버섯이 올라온 곰팡이 아르밀라리아 갈리카 ⓒDan molter

땅속 세계의 일꾼

제가 있던 실험실의 곰팡이은행에 보관된 곰팡이들은 모두 식물의 뿌리에서 얻은 것이었는데요. 식물의 뿌리를 감싸거나(외생균근) 뿌리 세포 내부로 침투해(내생균근) 식물에게 필요한 물과 미네랄을 전달해 줍니다. 이들은 식물에게 이로운 곰팡이로 근균이라 불립니다. 식물 종의 80프로가 근균과 공생 관계에 있지요. 하나의 식물 종에 여러 종의 근균이 도움을 주기도 하고, 한 종의 근균이 여러 종의 식물에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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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나무 뿌리를 감싼 외생균근, (우)식물 뿌리 세포로 들어간 내생균근

식물의 진화를 살펴보면 물속에 있던 식물들이 육상식물로 진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근균의 도움은 식물의 육상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요. 근균은 식물 뿌리에 붙어 식물 뿌리보다 더 촘촘하고 넓게 땅속에 퍼졌고 그만큼 많은 수분과 미네랄을 식물에게 가져다주었죠. 식물의 진화는 근균의 진화와 함께 한 셈입니다.

근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곰팡이가 식물, 나아가 생태계에 좋은 역할을 합니다. 식물의 씨앗 내부에 있던 곰팡이는 식물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곰팡이일 수도 있겠지만, 근균처럼 식물에게 이로운 곰팡이일 수도 있습니다. 씨앗의 발아와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죠. 곰팡이는 땅속에서 식물 뿌리들을 이어주어 한 식물에게 일어난 초식동물의 공격이나 환경 스트레스를 다른 식물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곰팡이에게 도움을 받는 식물은 질병, 곤충, 독성에 대해 높은 저항성을 갖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흔히 알려져 있듯 생태계에서 곰팡이는 분해자의 역할도 충실히 합니다. 바위와 죽은 동식물을 비옥한 흙으로 만들어 많은 식물들을 살게 하지요.

곰팡이를 돌보는 것이 식물을 돌보는 것

식물을 잘 자라게 하려면 좋은 흙이 필요합니다. 좋은 흙이란 영양분 외에도 식물을 도와줄 수 있는 곰팡이가 사는 흙입니다. 저는 곰팡이은행이 있는 실험실에서 각 식물 종을 돌봐줄 적합한 곰팡이 종을 찾곤 했습니다. 씨앗이나 새싹을 심으며 곰팡이도 함께 땅에 심어주는 실험도 했지요. 지금은 씨앗에게 필요한 곰팡이 종으로 씨앗을 코팅한 후 심는 방법도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곰팡이은행에서 색색의 실 같은 곰팡이가 투명한 유리 시험관 안에서 자라는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하곤 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다양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죠. 어쩌면 세상엔 눈에 잘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흥미로울지도 모릅니다.

※<식물관찰자의 일기> 코너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신혜우 작가님과 <식물관찰자의 일기> 코너를 아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