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판자를 붙잡은 난파자, 물속으로 한발 들어가는 구경꾼
- 한스 블루멘베르크, 『난파선과 구경꾼』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태어나고 보니 요람이 아니라 난파선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이들이 있다. 아직 다른 아기들의 요람을 못 봤기에 자신이 조난된 줄도 모른다. 이런 아이들은 문명사회 이전인 듯한 곳에서 유년 시절을 난다. 문화제도적 체계가 갖춰진 인간사회에서는 ‘근친상간’을 금하는데, 푸른나비(활동명)와 같은 이들은 근친상간(피해자들은 이 말에 반대하며 대신 '친족 성폭력'으로 부른다)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곳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연놈이 다 똑같아.” 40대 중반에 남편과 살던 집에서 딸과 함께 나와 쉼터에 피신해 있을 때 그녀 머릿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연놈은 엄마 아빠고, 그 두 가해자는 한통속이다. 2021년 나는 이 사건의 ‘구경꾼’이 되었다. 구경꾼은 어떤 존재인가. 단단한 대지 위에 서서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위 난파선에 위태롭게 몸을 기댄 사람을 바라보는 자다.
독일 은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난파선과 구경꾼』에서 삶이라는 항해를 하며 해난과 폭풍에 맞닥뜨린 난파자와 그를 지켜보는 구경꾼에 대해 연대기적 고찰을 한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해온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 첫 장은 이오니아학파 자연철학의 시조인 밀레토스의 탈레스로부터 출발한다. 구경꾼은 죽다 살아난 사람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로서 이미지화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불구경은 흥미롭다. 하지만 수동적 위치에 놓여 눈앞의 현상을 목격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것 역시 왠지 불편하다. 그리하여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는 호기심 많은 구경꾼의 지위를 정당화한다. 그가 말하길, 구경꾼은 지적 호기심을 지닌 근대적 존재다. 사람으로서 나 역시 남의 고통을 응시하는 즐거움을 느낀 적은 결코 없다. 다만 독자로서 갖는 지적 욕구가 있는 데다 난파자가 힘껏 손을 뻗어 널빤지를 붙잡고 살아남길 바라는 (그렇지만 안전한) 지점에 서서 호기심을 꺼뜨리지 않은 채 지켜본다.
푸른나비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스물한두 살이 될 때까지 몸을 만지고, 한 이불 속에 데리고 잤다. 성폭력은 손과 입, 혹은 그보다 더한 방식으로도 이뤄졌다. 엄마는 난파자의 머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겨 발을 구르는 걸 ‘구경’하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까지 이런 일을 속으로 삼켰다. 침묵은 개신교 하나님의 십계명을 그녀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였다. 그 시절 오직 신에게만 의지했던 푸른나비는 금과옥조로 여긴 십계명 속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를 범할 수 없었다. 종교는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서 유일하게 붙들게 된 판자였고, 40대 중반까지 그녀는 ‘종교중독자’처럼 살았다.
자신이 조난된 사실을 어떤 이들은 몇십 년이 지나고야 깨닫는다. 삶은 시곗바늘을 따라 그냥 흘러가기도 하는데, 새벽 어스름이 비쳐 밤이 물러가면 그녀는 아빠의 그 짓이 끝날 거라는 기대에 안도했고,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일 년 십 년……이 흘러갔다. 곧이어 한 남자와 결혼했고, 그 남자는 알코올중독과 양극성 성격장애로 가정폭력을 가했다. 또 다른 폭력과 마주한 그녀는 17년간 벽으로 밀쳐지고 칼 든 손에 맞서 견디다 마흔여섯쯤 집을 나왔다. 이후 엄마, 아빠, 남편의 폭력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엄마가 맨 앞에 놓였을까. “엄마가 가해자일 리 없다고 평생 부정하다가 결국 악인이라는 걸 인정했어요. 실은 가장 큰 가해자예요.” 엄마는 언제나 이런 말을 했다. “너보다 못한 사람도 많아. 장애인, 고아, 거지를 생각해봐.”
기억이 떠오르자 몸과 마음이 성치 못했다. 2년 동안 누워만 있었다. 딸을 먹이고 입히기는 해야 해서 그녀는 1년 일하고 1년 눕고, 다시 1년 일하고 1년 누웠다. 그동안 그녀를 구경한 사람은 많았다. 가족, 친구, 기자, 작가, 쉼터 지원자……. 블루멘베르크의 책에서는 난파자와 구경꾼의 관계에 대해 루크레티우스, 몽테뉴, 파스칼, 괴테, 헤겔, 니체의 고찰이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몽테뉴는 구경꾼을 옹호한다. 이유는 구경꾼에게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데, 이로써 그는 파도와 해일 밖에서 안전하게 목격의 즐거움을 누린다. 하지만 헤겔에 이르면 구경꾼은 반성적 주체로 거듭난다. 헤겔의 새로운 인식은 점점 더 파도 속으로 한 발씩 옮기며 위협을 느끼는 구경꾼(목격자)에게 딱 맞는 말이다. 오늘날은 기후위기로 인해 해일이 점점 잦아지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데다 모래는 점점 쓸려가 구경꾼의 발에도 물이 차오른다. 사건들이 빈발하고, 국가나 사회가 나를 지켜줄 거라는 안전한 감각이 상실되자 자신이 곧 다음 난파자일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실제처럼 다가온다.
이후 니체는 항해와 난파에 대한 상상을 몇 걸음 더 진전시켜 구경꾼의 인식에 새로운 기반을 마련한다. 니체는 구경꾼이 안전하지 않다고, 오히려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푸른나비에게 딱 들어맞는다. “지금은 안전하다는 감각이 있어요. 아직도 난파선 위일지 모르지만, 구출해달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 전에는 말을 억누르고 기도만 해 불행했어요. 지금은 길거리에 나가 내가 피해자고 생존자라는 말을 하니까 행복해요. 말하기가 바로 구해달라는 신호예요. 나를 구해줄 헬기가 있고, 제겐 나침반도 있어요.” 살아남을 거라는 감각을 거의 확신하는 난파자는 육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장소성’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잠시 머물다 간다. 이를테면 다른 난파자나 구경꾼과 같은 이들이. 거의 혼자 살아남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보며 구경꾼이 최종적으로 품는 감정은 경외감이다.
사실 구경꾼은 비판받아 마땅한 존재이기도 하다. 블루멘베르크의 책에 등장하는 구경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괴테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난파자를 구경하는 볼테르를 비판한다. 그런 괴테도 물론 구경꾼이었다. 문제는 괴테가 어떤 다급한 사태에 직면하면 타인보다 오로지 자신의 곤란에만 시선을 고정한다는 점이다. 예나대학의 역사학자 루덴이 이런 괴테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나 루덴 역시 완벽하지 못해 그는 훗날 자기 자신을 미화하기 급급했다. 거개의 구경꾼은 앞선 구경꾼을 비판하다가 훗날 자기 자신을 변명한다.
푸른나비도 몇몇 구경꾼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여동생은 옆에서 피해를 목격하면서도 “언니가 반항하지 않고 착해서 그래”라고 말했다. 그건 2차 가해였다. 때로 어떤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당신이 딸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죄의 대물림 같은 것은 가해자에게 해야 할 말인데도 구경꾼들은 거꾸로 피해자에게 겨눈다.
나는 그녀와 식당에서 만나 밥 먹으면서 인터뷰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점원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카드 기기에서 나온 음성 매뉴얼 때문인데, ‘카드를 ○○해주세요’라는 말이 그녀에게 성폭력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카페나 식당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이 말에 몸서리친다. 바다에서 가까운 뭍에 다다랐어도 물과 바람의 공포는 끊임없이 밀어닥친다.
이 책은 난파자와 구경꾼을 비유로서 끌어오고 있다. 그렇긴 하나 1897년 남극 탐험을 떠났다가 실제로 바다 위에서 조난당한 벨지카호를 한번 살펴보자. 이들은 과학적 호기심과 자기 나라를 향한 애국심, 그리고 모험심을 갖고 배에 올랐다. 1897년 8월 16일에 출항한 배는 그러나 얼음 속에 갇혀 2년도 더 지난 1899년 11월 5일 아침에야 돌아온다. 총 19명이 떠났지만, 한 명은 죽고, 가장 경험 많고 신뢰 가는 인물이었던 갑판장 톨레프센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미쳤다. 즉 난파자는 실제로든 비유상으로든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푸른나비가 자살 시도를 하고, 약을 먹고, 상담을 받고, 가정폭력·성폭력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는 이유다.
난파자들의 상당수는 열혈 독서가이기도 하다. 미해결된 범죄 사건에 놓인 피해자는 책에 매달린다. 자신과 같은 사건에 직면한 이들에게 국가나 사회가 해결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 책을 파고들 수밖에 없다. “생존자가 바라보는 난파는 최초의 철학적 경험의 상징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책은 처음에는 항해자들이 호기심으로 먼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혹은 물건을 교역하고자 바다로 나섰다가 난파당한 예를 든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항해자보다 구경꾼의 호기심이 더 강해진다. 구경꾼은 참여관찰자처럼 점점 더 난파자의 사태에 개입하게 된다. 그가 잘 살아남을지, 막대기나 플라스틱 조각이라도 던져줘야 할지, 국가나 사회가 이들의 조난에 두 손 놓고 가만있지나 않을지 초조해하며 지적으로, 행동으로 무장해나간다.
※<책의 밀도> 코너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이은혜 편집장님과 <책의 밀도> 코너를 아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