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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밀도

자기 자신에서 가장 멀어지고 타자화되는 질병
- 앤 보이어, 「언다잉」

  •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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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능성은 어느 가능성의 끝에 도달하고자 자기 자신을 소진하는 각 개인의 능력에 좌우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능력을 입증하려고,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되려고 육체와 정신을 갈아 넣다가 다음과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한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난 지 6개월.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몸 여기저기를 긁느라 손은 책장을 넘길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두드러기가 시작된 것은 왼쪽 눈두덩이부터였다. 병원에서는 ‘비만세포’가 생긴 것 같고 그 원인은 알 수 없으며 1년 뒤면 증상의 30퍼센트, 3년 뒤면 대부분이 사라질 테니 그동안 약을 먹으라고 한다. 그에 앞서 감기에 걸렸다. 열흘 뒤 감기는 나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침은 계속된다. 폐가 약해진 나는 기침 증상으로 비호감의 낙인이 찍힐까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위축된다. 사십대 중반에 불과한 나이에 또 한 가지 증상이 더해지고 있다. 구강 점막이 수시로 생겨 온종일 신경을 건드린다. 스트레스, 신체의 피로, 면역장애와 위장장애가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 세 가지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자 저쪽 세월에서 이쪽 세월로 건너온 느낌이다. 저쪽은 내 세상이 아니고 청년들의 것이다. 중년은 이처럼 일시에 급습한다.

위에 열거한 증상은 나의 것이지만, 아직 암을 겪지 않은 이로서 앤 보이어의 유방암 투병기 『언다잉』을 읽자 내 증상의 나열이 징징거림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 용감한 여성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책을 만들거나 읽는 행위는 더 세고 더 자극적인 경험을 목격하는 것과 동의어다. 바로 이 순간 내가 편집하고 있는 책이 일반 성폭력이 아닌 ‘친족 성폭력’이듯이. 친족 성폭력은 피해자가 태어난 이유를 기반부터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

『언다잉』은 300쪽 전체를 고통에 대한 사유로 채운다. 고통은 뭐 하나 좋을 것이 없지만, 글을 쓰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유일하게 좋다. 잔인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겪을 만하다. 이 책은 암을 앓지 않은 사람이라면 의자에 앉아 편하게 읽는 것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새까만 먹구름, 감당할 수 없는 폭풍, 완벽한 인생의 실패를 예고한다. 삶보다 죽음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고, 거의 죽음에 근접한다.

투병에 관한 다른 에세이들과 앤 보이어의 글이 구분되는 탁월한 점은 질병을 젠더적, 계급적, 인종적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 책은 누구나 투병기를 펴내는 요즘 시대에 다수의 작가처럼 소란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편집자인 나는 암 생존기, 우울증과 동거하기 등의 에세이 투고를 자주 받는다. 한 사람이 죽음에 문턱에 이른 경험을 담았기에 절박하지만 여지없이 거절할 때가 많다. 이런 거부는 잔인하다고 비판받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죽는 순간에조차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과 세상을 보는 시선을 편집자와 독자는 원한다. 그리고 그런 책의 판매 대금으로 다음에 펴낼 책의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이 세계의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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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보이어는 ‘나’를 재료 삼아 단어와 문장으로 변환시킨다. 구글에 그녀 이름을 입력하면 암을 앓기 전의 건강한 모습이 나오지만 그것은 문장으로 표현되기 전 그녀의 생이다. 독자인 나는 그 삶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투병 중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먹고살 걱정을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죽기도 전에 온갖 죽음을 먼저 겪게 하는 황폐한 젠더적 질병의 한 사례로서 입을 여는 사람이다. 보이어는 유방암과 자기 자신을 하나의 고리로 엮으면서 ‘감정’보다는 ‘인식’의 영역에 진입하려고 계속 시도한다. 그것이 적잖이 이해되는데, 병에 걸린 사람은 병에 걸린 이유의 오리무중부터 환자를 언제든 속여먹을 수 있는 병원의 불완전함, 죽음의 불투명함 등에 둘러싸여 있기에 슬픔에 겨워하기보다는 인식의 투명성에 다다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이유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을 가장 억울해하고, 그래서 귀신이 되어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이도 있지 않던가.

서기 143년 소아시아 태생인 그리스의 웅변가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는 이 책의 처음부터 등장해 마지막까지 보이어와 여정을 함께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물여섯 살에 병에 걸려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 머물면서 신이 내려주는 꿈들에 관해 기록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갖 수를 써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암을 앓게 된 보이어가 인지적 무능함을 극복해보려고 투병의 와중에 고대 시기까지 거슬러갔음을 뜻한다. 아리스티데스가 몸의 무능을 겪으며 하락의 길을 걷는 와중에도 적고 가르치고 말했듯이, 보이어도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 휠체어를 끌고 학교로 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강의하고 기록한다.

보이어는 살아남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음과 동시에, 병원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환자의 신자유주의적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거부감을 표출한다. 이 책은 죽음에 관한 몇몇 책들이 그러하듯이 윤리적 수행을 철저하게 해낸다. “죽음에 관한 글쓰기는 만인에 관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 근접한 이는 타자가 되고, 타자가 되면 세상의 고통에 반대할 수 있다. 또한 질병을 앓는다는 것은 이전의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멀어지는 행위, 더 이상 자신일 수 없는 경험이다.

앤 보이어는 암을 겪는 자신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불평등과 빈곤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민주적인 것은 있으니, 바로 암이다. 암은 모든 환자의 외모를 민주화한다. 다들 대머리이고, 안색이 하나같이 피폐하며,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은 부어 있다. 죽음 자체가 평등의 성질을 드러내듯, 암도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일 뿐, 투병 과정이 자기 계급의 위치를 드러내는 연속임을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그녀는 항암치료로 인해 이제 인지력을 상실하고 심장병까지 앓게 되었다. 항암 화학 요법은 뇌 손상을 누적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억을 계속 잃는다면 이제 그녀는 자기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단계만 남은 걸까? 오늘도 “과로에 도취해 있”는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