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나무 위의 나무, 풀 위의 풀
- 글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맛없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잎사귀 속에 숨어있던 초록 감들이 주홍빛으로 익어가고 있지요. 탐스러운 색의 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주변에 감나무가 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감나무는 따뜻한 곳에 잘 자라 남쪽에서 많이 키웁니다. 남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감나무와 관련된 추억이 많지요. 초등학교 교문에 있던 감나무에서 도톰하고 항아리 모양을 닮은 감꽃이 떨어지면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곤 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올 즈음이면 약간 덜 익은 감을 장독대에 두고 완전히 홍시가 되는 추운 겨울날 꺼내 먹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꿀처럼 달고 부드러운 홍시였지요. 그 안에 캐러멜색의 윤나는 씨앗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씨앗을 심어서 나무로 키워 또다시 이렇게 맛 좋은 홍시를 얻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맛있는 감에서 얻은 씨앗을 심어서 키우면 그 나무에서는 그 정도로 맛있는 감이 열리지 않는답니다. 작고 맛없는 감이 열려 그런 감을 돌감이라 부르지요. 감뿐만이 아니라 맛 좋은 과일 대부분이 맛없는 자손을 만들기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기이한 상상력, 접붙이기
부모 세대의 특성은 자손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유전자는 섞이고, 유전자에 의해 나타나는 형질도 다르지요. 또 어떤 특성은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돌감이 열리는 이유도 이런 유전적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맛 좋은 열매를 주는 감나무만 계속 키우기 위해 접붙이기를 합니다. 맛 좋은 열매를 주는 가지를 잘라서 다른 나무에 붙여 묘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래쪽에는 다른 나무지만 위쪽에는 맛있는 열매를 주는 가지와 유전적으로 똑같은 나무로 성장하는 것이죠. 가지에는 똑같이 맛있는 감이 열립니다. 감나무 외에도 포도, 복숭아, 배, 귤, 아보카도 등 많은 과실수가 접붙이기로 태어납니다. 뿌리 쪽 나무는 다르지만 위에 붙어 자라는 나무들은 유전적으로 똑같은 복제 식물들이 많지요.
접붙이기는 어떤 식물 일부를 다른 식물에 붙여 하나의 개체로 키우는 걸 말합니다. 같은 종을 접붙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종을 접붙이는 게 흔한데, 그러면 각기 다른 종의 유전적 장점을 한 개체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나무의 경우 흔히 고욤나무 위에 붙입니다. 뿌리 쪽 고욤나무는 열악한 환경에 강하고 뿌리로 영양분을 잘 흡수하며, 위쪽 감나무는 맛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죠. 접붙이기를 이용하면 인간에게 여러 이점이 있습니다. 맛 좋은 열매나 아름다운 꽃, 질병과 해충에 강한 특성 등 필요한 특성을 조합해 가져올 수 있죠. 어떤 식물은 몇 년 동안 자라난 후에야 열매를 맺는데 그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과실수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자 할 때도 기존 나무의 뿌리 위에 새로운 나무를 접붙여 빠르게 종을 바꿀 수도 있지요.
접붙이기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찍부터 인류는 접붙이기를 알고 활용해 온 것인데요. 인간이 각기 다른 식물의 특성을 편리하고 빠르게 얻기 위해 두 종을 직접 붙일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지요. 그러나 동물에게 적용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면 끔찍한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침팬지 하반신에 인간 상반신이 붙은 걸 상상하면 정말 기이한 모습이지요.
사랑, 공존, 끔찍한 결합?
올해 여름 저는 해남 대흥사에서 느티나무 연리근을 보았습니다. 식물 조사를 가면 종종 연리지나 연리근을 만나는데 대흥사 연리근은 아주 웅장해서 인상 깊었지요. 연리지나 연리근은 두 개 나무의 줄기나 뿌리가 붙은 걸 말합니다. 사랑의 상징으로도 여겨지죠. 그러면 이렇게 자연적으로 두 나무가 붙은 것도 일종의 접붙이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연리지나 연리근의 두 나무가 완전하게 물과 양분을 공유하는지, 겉 부분만 얽힌 것인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접붙이기의 원리는 식물 줄기에 있는 형성층과 관련 있습니다. 식물의 줄기에는 물관과 체관이 있고, 그 사이에 형성층이라는 조직이 있어 여기에서 왕성한 세포분열이 이루어져 새로운 물관과 체관 세포를 만듭니다. 접붙이기는 이런 형성층을 연결하는 것인데, 아래쪽과 위쪽 나무의 잘린 단면에서 형성층 부분을 맞붙이고 잘 고정하면 이 형성층이 세포분열을 통해 두 나무의 물관과 체관을 잇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나무 간에 물과 양분이 이동하면서 하나의 개체처럼 자라는 것이죠. 위아래의 개체들이 섞이지는 않고 각각 생존하는 것입니다. 접붙이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종이 어느 정도 계통적으로 가까워서 형성층이 잘 연결되어야 합니다.
나무뿐만이 아니라 풀에서도 접붙이기는 가능합니다. 포마토가 대표적이죠. 토마토와 감자를 접붙여 위에는 토마토를 얻고 뿌리 쪽에서 감자를 얻습니다. 꽃집에서 흔히 파는 선인장 중에도 두 종류의 선인장을 붙여 파는 경우가 흔하죠. 뉴욕에 있는 한 대학의 조소과 교수인 샘 반 아켄(Sam Van Aken)이 접붙이기를 통해 40종을 붙여 만든 나무는 유명합니다. 이 나무에서는 40종류의 꽃과 열매가 맺히죠. 다른 조각들과 함께 학교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교정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한 접붙이기를 한 나무에 여러 번 활용한 것이죠.
키메라, 식물 괴물
접붙이기로 탄생한 나무를 무슨 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켄이 만든 40종이 붙어 자라는 나무를 보면 더욱 난감한 물음입니다. 그런데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접붙이기를 통해 만들어진 나무는 유전적으로 섞이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잡종이라고 불리지 않지요. 두 종이 결합 된 형태가 자손에게 전달되지 않고, 접붙이기가 된 부분을 경계로 각 식물은 고유한 유전자를 가지고 각각 본래의 형질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접붙이기를 통해 그래프트-키메라(graft-chimaera)라는 현상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래프트는 접붙이기라는 뜻이며, 키메라는 유전학에서 한 개체가 두 종류 이상의 유전자형을 가진 세포로 이루어지는 걸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 종류의 유전 정보를 가지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건 발가락이건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부분에서든 같은 유전자를 얻을 수 있지요. 범죄 현장에 남은 작은 조각에서 DNA를 찾아 범인을 밝힐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키메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전자형이 다른 세포가 섞여 있어서 어느 세포에서 DNA를 얻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프트-키메라는 접붙이기 한 단면에서 세포들이 섞여서 자라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DNA가 섞이고 합쳐지는 건 아닙니다. 그저 서로 다른 세포들이 섞인 세포 덩어리죠. 최초의 그래프트-키메라 식물은 비자리아(Bizzaria)인데, 이 나무는 두 종류의 귤나무류가 섞여 이상한 형태로 자랍니다. 열매를 보면 두 종의 형질이 얼기설기 나타나 기괴한 모습입니다. 식물 괴물처럼 느껴지죠.
생명을 다루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손으로 유전되지 않는 접붙이기 생물과 달리 지금은 완전히 DNA가 섞인 잡종과 유전자 재조합 식물이 넘쳐납니다. 마음대로 종을 결합해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원숭이와 인간의 결합도 이미 시도되었죠. 이런 일들이 과연 실험실 내에서만 일어나는 걸까요? 인간의 욕망으로 창조된 기괴한 생물들은 이미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무생물만 있던 지구에 생물이 탄생하고, 진화를 거쳐 다양한 종들이 생겨난 기적 같은 지구 생명체들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한 이상한 생물들이 생명의 질서를 바꾸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접붙이기처럼 눈에 보여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많겠죠.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고뇌하고 절망해야 하는 시간은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