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여행에서 모은 잡동사니, 천 조각 그리고 폐지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여행을 막 다녀온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지루할 때가 있다. 보고 느낀 것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데, 그들이 느낀 진기함은 그 말 속에 함몰돼 상대는 정보의 나열이나 흥분의 고조만을 듣게 된다. L 감독이 그랬다. 몇 개월 동안 외국에 다녀와 늘어놓은 것은 문장으로 건질 게 하나도 없었고, 공명되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말들은 잎을 틔우기는커녕 씨앗이 될 기미조차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틈이 없는 이야기, 여백이 없는 이야기는 청자의 귀를 닫아버린다. 반대로 실크로드를 한 번도 다녀오지 않고 쓴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이나 김훈의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읽는 이를 사막 한가운데로 데려다놓는다. 나는 책상에 앉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모래바람을 맞으며 달을 보았고, 말 울음소리를 들었다.
황제로서 세계의 도시들을 자신의 제국에 포섭하려는 쿠빌라이 칸과 그의 사신으로 온 도시를 다니는 마르코 폴로의 가상 대화록인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평범한 여행자들의 기억을 헤집어놓는다. 황제처럼 멀리 내다볼 시야가 없고 사신처럼 세밀히 볼 눈을 갖지 못했기에 식빵처럼 납작하기만 했던 여행의 기억들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사신-황제의 역할을 각각 맡아 서로 대화하게 만든다.
올여름 여러 사람과 에든버러, 더블린을 다녀온 뒤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이 책을 읽었다. 에든버러행은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실패에 가까웠다. 파주출판도시를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축제 도시 에든버러에서 얻자는 게 목표였건만 여행 내내 과거 삶의 잔해 같은 것을 보거나, 의도치 않은 기억들이 떠올라 오히려 내 관심사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향했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자기 기억에 붙들려 과거를 되새김질하기 쉬운데, 여럿이 떠나도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주로 시간여행을 하듯 지난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이 되지 못한 과거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쉽게 ‘삶은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이 곧 생인 것처럼 매달려온 S와 K는 오십대 중반에 접어들어 여행 내내 그동안 삶에서 배제시킨 것들을 곱씹었다. 그건 일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살아온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삶에서 종종 소외시킨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S와 K는 나와 다른 점이 있었으니, 따뜻하고, 모나지 않고, 너그럽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발달된 사회적 자아 덕분인데, 둘 다 막내로 태어나 마치 맏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온 것이 그들의 외형을 빚어놓았다. 그것은 둘에게 ‘자신이 진짜로 욕망하는 것’을 후순위로 놓게 해 중년에 방황할 거리를 예비해두기도 했지만, 내겐 그 모습이 진정 그들다워 보였다.
반면 사회적 자아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나는 여행에서 할퀴는 말을 몇 번 들었다. 열흘간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태도들이 만난다는 뜻인데, 내 태도는 이따금 평지를 뚫고 돌출된다. 어느 날 내가 문자 한 통만 남기고 말없이 일행에게서 떨어져나와 숙소로 먼저 들어갔더니 S는 후에 “그 정도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조언은 부드러워도 상처를 낸다. 듣는 이가 타인의 판단에 붙들려 꼼짝 못하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 전날 나는 대화 중에 자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이런 말도 했다. “저는 숲이 좋아요.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어서요”라고 했더니, S는 “치유된 게 이 정도예요?”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 순간 숲을 좋아한 것이 숲에게 미안해질 만큼 내 마음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숲마저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사람일까. 농담과 ‘좋은 말’은 때로 여행에서 핵심으로 남지만, 누군가가 안간힘을 써서 잊으려는 기억도 때론 여행에서 비롯된다.
나와 일행의 대화가 가끔 긴장과 충돌의 기미를 보였던 것처럼, 칸과 마르코도 서로 눈치를 보며 황제는 듣고 싶은 것을 들으려 하고, 사신은 자신이 중시하는 것들을 묘사하려 한다. 하지만 그 대화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는, 처음에 이국의 풍물과 제도 등 도시의 화려한 면모를 궁금해했던 황제가 점점 사신의 이야기에 스며들어 둘은 냄새나는 뒷골목을 나란히 걷는 듯 동행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조금 변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네에게 알고 싶은 건 이런 걸세. 숨겨 가지고 온 걸 고백하게. 심리 상태, 아름다움, 슬픔들을!” 나 역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지형이나 벽돌의 재질, 색깔, 주택들의 아치와 문의 모양을 세세히 살피기보다는 벨파스트에 사는 것의 슬픔을 엿보았고, 또 우리와는 달리 매사에 웃음을 헤프게 짓는 영국인들의 아름다움을 보기도 했다.
우린 이번 여행에서 말을 많이 했지만, 상대가 차마 말하지 않은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태도, 사물을 보는 관점,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방식, 결코 내뱉지 않는 어떤 결여된 생각들이 그의 지난 삶을 그려보게 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한발 떨어져 나온 여행자는 보통 너그러워져 서로 쉽게 섞여들지만, 실은 눈빛과 말투, 몸짓 하나하나가 타인에게 읽힐 빌미가 되어 우리는 벌거벗은 모습이 된다.
한편 모든 여행은 시각적 경험을 강렬하게 남겨 내가 사는 곳과 방문한 곳을 견주며 그 도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마르코 폴로는 칸에게 말한다. “페린치아의 거리와 광장에서 매일 폐하는 장애자, 꼽추, 뚱뚱한 남자, 수염 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병렬이 등치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뚱뚱한 사람은 장애인이나 꼽추와 나란히 놓인다는 뜻이다. 뚱뚱한 것은 마치 질병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비만에 대한 인류의 지속되는 경멸은 어디서나 읽고 목격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 누군가도 영국 여자들은 뚱뚱하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내 귓가를 내내 맴돌았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서슴없이 응시의 권력을 가져도 되는 걸까? “후유…… 저기 저 사람 뚱뚱해서 내가 다 숨이 차다.” 서울에서 몇 번 만난 작가 A는 길을 걷다 맞은편에서 살찐 사람이 걸어오면 어김없이 이렇게 반응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라고 그 자리에서 반박해도 내 말은 그의 귀에 가닿지 않는 듯했다.
여행의 또 다른 일행이었던 H는 어쩌면 이번에 가장 값진 것들을 얻었을지 모른다. 칼비노의 소설에서 말하듯 수많은 도시는 눈이 있는 자들에게조차 “보이지 않는”데, 시력이 거의 훼손된 H에게 에든버러가 더 잘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팡이와 망원경과 다른 사람의 팔에 의지하며 다니는 그의 뒷모습은 오히려 청년처럼 가장 젊었고, 그의 혀에서 맴돌거나 뱉어지는 말들은 누구의 말보다 부드럽고 자유로웠다. 나머지 일행과 달리 과거에 에든버러를 몇 차례 방문했던 사람으로서 그는 그 도시의 공기를 환기하고 있었다. “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H는 수년 전 이곳에 공연팀을 이끌고 온 적이 있고, 거리의 모퉁이나 창살마다 자기 기억을 새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곳을 고향처럼 편안히 느끼는 듯했다. H는 한창때를 넘겨 에든버러에 처음 온 우리 일행을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도시에 넘쳐흐르는 청춘남녀의 연애 감정 같은 것을 낭만적으로 느끼며 한 말이었지만, 그곳 축제의 공연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 자체가 이미 청춘을 지나 어느 정도 겉돌고 탁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령 옥스퍼대학 아카펠라 동아리의 공연을 보며 나이 든 우리는 젊은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다’ ‘기특하다’라는 식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식을 대하는 심정처럼.
“어쩌면 우리의 대화는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가진 두 거지들이 하는 대화인지도 모르네. 두 사람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녹슨 잡동사니, 천 조각, 폐지들을 모아 쌓지.” 칸은 긴 대화를 하던 중 마침내 사신 마르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문장은 어떤 말보다 그윽하고 진실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칸의 현실이 온갖 보석으로 둘러싸여 화려한 만큼 그는 현실의 포로가 되어 있는데, 그때 멀리서 사신 마르코가 온갖 도시의 기억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리하여 황제의 도시가 맞을 미래란 여태껏 심고 일궈온 과거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예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든버러와 더블린에서 우리도 넝마주이였을 것이다. 열심히 과거를 헤집었더니 건져올린 것은 찌꺼기 같은 것, 꿈쩍도 하지 않는 과거, 내뱉지 말아야 했던 말들, 겸손을 가장한 약간의 나르시시즘, 거의 변화시키지 못할 근미래 같은 게 아니었던가.
마지막 날 더블린에서 K는 조금 취했다. 나와 S를 위해서였는데, 그날 밤 K는 대화의 가교가 되기 위해 술도 먹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 좋은 말들을 했고, 그건 안개 많은 더블린에 모든 기억을 남겨놓고 오도록 해주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정말로 ‘거지’나 ‘넝마주이’가 되지는 않도록, 낡은 외투라도 하나 건져올리도록 K는 미래에 조그마한 틈을 내주었다. 그 사이로 휘영청 만월이 떠오르더니 우리 세 사람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