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식물의 피
- 글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생물의 핏줄을 따라
며칠 전 한반도 땅끝에 사는 식물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보길도와 해남은 남쪽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을 많이 품고 있지요. 저는 남쪽으로 내려가며 바뀌는 식물 종과 바닷속 해조류를 관찰했습니다. 이 여행은 생물의 진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이었는데요. 여행 내내 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저는 바닷가에서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새벽 6시에 양식장 선장님의 배를 타고 다시마를 키우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투명한 청록색 바닷속 검은 물결을 이루는 거대한 다시마는 정말 장관이었죠. 갈조류인 다시마는 우리 주변 식물과는 계통적으로 먼 관계에 있어 녹색식물로 분류되지 않지만, 뿌리와 줄기가 있는 거대한 잎의 모습에서 원시 식물 조상을 상상하게 합니다. 선장님은 바로 건져낸 다시마를 먹어보라 권하셨는데요. 그 맛은 청록색 투명함이 느껴지는 신선한 바다의 맛이었죠.
수확한 다시마는 곧장 전복 양식장으로 옮겨가 전복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선장님은 전복도 맛보라 권하셨지요. 저는 바다에서 막 올라온 전복이 상상 이상의 빠른 속도로 배 위를 기어 다니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전복은 배 위에서 달팽이처럼 두 더듬이를 뻗고, 넓게 펼쳐진 발을 껍질 양옆으로 팔랑거리며 질주했습니다. 놀라운 생명감에 먹기 망설여졌지만, 전복은 어느새 평생 달고 살았을 껍질이 뜯기고 먹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반으로 잘린 단면은 이전에 먹었던 전복과 달리 물처럼 투명한 살에 하얀 실핏줄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전복의 맛은 다시마를 농축한 것 같고, 아주 신선하고 짭짤했습니다. 이전에 알던 전복 맛이 아니면서도 어디선가 분명 먹어 본 것 같았죠. 순간 저는 그것이 피의 맛이라 느꼈습니다.
지구의 생산자, 식물의 피
생명체가 출현한 물, 바닷물을 가득 품은 다시마, 다시마를 먹고 자라난 전복, 전복을 잡아먹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흐르고 농축되는 액체, 피의 흐름에 대해 상상해 봅니다. 어느 영화에서 우스갯소리로 진화는 맛있어지는 과정이라고 하던데, 이 말의 다른 표현은 ‘진화는 잔인해지는 과정’ 혹은 ‘생물들의 피가 농축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다면 다른 생물을 잡아먹지 않는, 지구의 생산자인 식물은 공기, 물, 흙에 가까운 덜 잔인한 피를 가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식물의 피 맛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채소와 과일의 맛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이, 상추, 딸기, 복숭아 등 식물의 맛은 종마다 다양합니다. 그 맛을 떠올리면 식물의 피가 인간의 피보다는 덜 짜고, 덜 비릿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지구에 있는 많은 식물 종을 생각하면 인간의 피와 비슷한 맛, 조성을 가진 식물도 있지 않을까요?
바닷가에 자라며 염분을 잘 견디는 식물을 염생식물이라 합니다. 염생식물 중에는 짠맛이 나는 식물이 여럿 있는데요. 퉁퉁마디속Salicornia 식물들이 대표적입니다. 함초라고도 불리는 퉁퉁마디는 바닷물이 넘나드는 흙에서 자랍니다. 말려서 수분을 날리면 소금 대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염분을 가지고 있지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식염수를 대신해 코코넛 워터를 환자들에게 정맥 주사로 투여한 기록이 있습니다. 어린 코코넛 열매 속에는 액체가 가득한데 이것을 코코넛 워터라 부르고 흔히 주스로 판매하지요. 코코넛 워터는 피처럼 짜지 않고 칼륨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정맥에 주입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마시는 편이 훨씬 건강에 좋지요. 그러나 어린 코코넛 열매 속은 완전한 무균 상태여서 깨끗한 액체가 부족한 전쟁 상황에서 식염수 대용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식물 헤모글로빈
헤모글로빈은 흔히 동물의 피에서 발견되는 산소 운반 단백질입니다. 그래서 산소 운반이 필요하지 않은 식물의 경우 발견되지 않았죠. 식물에서 헤모글로빈이 처음 보고된 것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관련이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혹에 살면서 질소를 공급해주는 박테리아는 생존을 위해 산소를 필요로 하는데요. 식물의 뿌리의 헤모글로빈이 뿌리혹박테리아에게 산소를 전해주는 것이죠.
우리의 피는 혈장이라 불리는 액체 성분이 55%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과 같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피의 45%는 적혈구로 세포 중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 적혈구로 인해 피는 붉은색을 띠지요. 정확하게는 적혈구 내에 있는 2억 8천 만 개 정도의 헤모글로빈 단백질이 피 색의 근원입니다. 이와 달리 식물의 붉은색은 안토시아닌과 같은 식물 색소에서 비롯되는데요, 이런 색소 대신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어서 붉은색을 내는 식물이 있습니다. 2014년 식물학자들에 의해 비트의 헤모글로빈이 보고되었는데요. 비트에는 인간 헤모글로빈과 거의 유사한 헤모글로빈이 있어 추출한다면 혈액 대용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루카,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리
루카(LUCA)는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의 약자로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을 말합니다. 35 ~ 38억년 전, 지구에 최초로 등장한 생물을 이르는 것이죠. 이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모든 생물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식물, 동물, 박테리아 등 모든 생물이 하나의 조상에서 갈려져 나왔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이론이지만, 태초에 여러 조상이 있었을 것이란 이론보다 과학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이 공통적으로 DNA, RNA, 단백질 등을 가진다는 것이 그 근거지요. 식물 헤모글로빈과 동물 헤모글로빈의 유사성은 헤모글로빈을 만드는 유전자의 유사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전자의 유사성은 유전자를 전해준 식물과 동물의 공통 조상이 누구일까 생각하게 합니다.
상처가 나면 피가 흐릅니다. 우리는 상처의 고통으로 다른 생물의 고통을 헤아리고 아픔에 공감합니다. 다른 생물을 존중해야 한다고 느끼죠. 그러나 상처가 나지 않아도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피에는 이미 다른 생물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피는 모든 생물이 하나의 가족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