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내게 없는 몸을 향한 읽기와 동경
- 얀 그루에, <우리의 사이와 차이>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길을 걸을 때 불문율이 있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지 말 것. 모르는 이를 길게 바라보는 것은 눈인사일 리 없고, 관찰이나 판단하는 시선으로 읽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공원을 걷는데 마주치는 사람은 20여 명. 같은 곳에서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이들과는 인사하지만, 그 외에는 눈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 여성이 늘 같은 시각 아들 손을 잡고 지나간다. 둘은 유일하게 시선을 받는다. 음성 틱 증상을 지닌 아이는 어른들이 저절로 쳐다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몇몇은 탄식이나 감탄도 내뱉는다. “쯧쯧. 저 엄마 정말 대단해. 엄마 먼저 죽으면 아들은 어떡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엄마이고, 아이는 다 큰 십대인데도 불구하고 들을 귀 없는 존재로 여겨지거나 혹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두운 미래의 주인공으로 낙점된다.
시선에는 두 종류가 있다. 미국 태생의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60여 년간 살았는데, 모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일본에 그리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무어냐고 묻자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답했다. 서양인이자 키 큰 여성으로서 그녀는 일본인이 자신을 ‘가이진(外人)’으로 바라보는 특권을 누렸다. 근대 시기 중국의 식자층 남성들도 타인의 시선을 즐겼다. 문호가 막 개방되던 시기 국제화된 세계에 몸담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인민들의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꺼워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시선은 이런 유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 ‘낙인(stigma)’이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얀 그루에는 자기 삶의 기억과 기록을 총동원해 『우리의 사이와 차이』로 써냈다. 얀은 세 살 때 척수근육위축증이라는 난치성 유전질환을 진단받았다. 걷지 못하고, 오래 못 살 거라는 임상적 예측과 달리 현재 40대인 그는 언어학자가 됐고, 가족을 꾸렸으며, 자식도 두었다. 책과 문헌을 들여다보는 일이 직업이지만, 그의 언어는 그의 신체를 거쳐서 흘러나온다. 발화되기 전 몸이 언어를 흡수해 한 치의 빈말도 없게끔 만든다. “하나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하나의 신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낙인찍힌 존재는 여러모로 노력하는 삶을 사는데, 얀이 기울인 노력의 대부분은 비장애인들과 겨뤄도 뒤지지 않을 학자로서의 실력을 갖추는 것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쏟아졌다. 그는 비장애인의 시선을 꺼리지만(그 눈빛에는 어떤 인식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장애인의 시선도 꺼린다(자신은 더 중증의 장애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그들과 동류로 묶이는 것이 때로 불편하므로). 하지만 소아마비를 앓았던 미국의 저명한 장애인 마크 오브라이언은 부딪히기 싫은데도 계속 그의 삶에 나타난다. 이미 고인이 된 마크는 장애인으로서 ‘대표성’을 지니는 데다, 얀보다 앞서 자신의 장애를 직시하는 책을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크는 얀이 될 수도 있었을 일말의 가능성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 얀 자신과의 차이점을 끊임없이 발견케 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비장애인’으로서 읽고 있다. 나이를 점점 먹으면서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 하나둘 늘어나니, 게다가 장애-비장애의 이분법적 틀은 맞지 않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도 틀리겠지만, 어쨌든 낙인찍힌 장애인의 삶을 살고 있진 않다. 나는 장애인을 가까운 지인으로 둔 적도 없다. 아니 어쩌면 장애인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비가시적 존재로 여겼을 수도 있다. (공황장애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는 주변에 꽤 있지만, 이는 선천적 불구가 아니고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의 장애와 구별된다).
유독 중년 여성 한 명만큼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몇 년 전 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다가 하루는 후배와 함께 하이델베르크행 기차를 탔다. 차내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한국 여성 한 분이 저편에서 다가왔다. 자신도 목적지가 같은데, 내리는 곳을 알려달라면서. 혼자 온 분이었고, 행선지가 같으니 흔쾌히 도울 수 있는 일인 데다, 그녀는 양팔이 없어 마음이 적잖이 쓰였다. 혼자 여행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즐길 만한 일이지만, 그녀는 혼자인 게 불편해 보였다. 몇 좌석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계속 시선을 우리에게 줬다. 목적지에 도착해 함께 내리자고 말하면서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심어졌다. 하이델베르크 성 주변을 걷는 내내 그녀는 두세 발짝 뒤에서 우리를 계속 쫓아왔다. 우리는 웃으며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녀는 노골적이었다. 처음엔 기꺼운 의무로 받아들였던 그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조용히 철회되었다.1) 신경 쓰이고 불편했다. 여행을 온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말했다. “혼자 왔으니 그냥 뒤에서 쫓아만 다니면 안 될까요?” 우리 역시 단도 직입적이었다. “그건 좀 어렵겠어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애써 들어가려는 신입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녀는 말이 많았고 특별히 친절했다. 자신은 공무원이며, 회사에서 도서전 때 여행을 보내줬다는, 묻지 않은 답을 했다. 우리는 음료를 사 먹으러 가게에 들렀다. 그녀가 점원에게 다가가 대신 음료 값을 지불하려 했다. 그런 친절은 몹시 불편했다. 중간중간 길과 상점과 자연을 구경하면서 ‘이젠 갔겠지’ 하고 뒤돌아보면 그녀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우리는 더 차갑고, 더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저희 둘이서만 다니고 싶어요.” 마침내 그 그림자는 사라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림자의 눈빛과 음성은 더 짙어져 수년간 수면 아래 잠들어 있다가 불시에 떠오른다. 하루쯤은 낯선 이와 동행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그림자는 묻는다.
『우리의 사이와 차이』의 독서는 이렇게 진행된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끊임없는 비교, 장애인의 삶에 대한 짐작, 내 삶에 대한 반성, 그리고 장애인과 더 잘 지내고 싶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 타인을 알고 싶은 게 삶의 원동력 중 하나라면, 더 낯설고 멀리 있는 타인일수록 알고 싶다는 마음은 더 커지고, 그런 점에서 내게는 타고난 장애인이 쓴 『우리의 사이와 차이』가 몹시 흥미로웠다.
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세 살 때 진단받은 이후부터 그의 부모는 모든 임상 기록을 보관해왔고, 그는 다른 자식들이 부모에게 추억과 기억을 선물받을 때 ‘기록’까지 덤으로 받는다. ‘기록’은 나의 ‘기억’과는 전혀 상관없다. 그건 기록자의 시선에 의해 쓰인 것이고, 푸코가 지적했듯이 그런 기록에는 달갑잖은 임상가들의 권위와 자의성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억이 담고 있지 못한 역사를 내보이며 딱딱한 언어 속으로 자꾸만 저자를 데리고 가 더 사적이고 진실에 가까운 삶의 언어를 직조해내도록 자극한다. 임상의 언어로 내 삶을 설명할 순 없기에 그로부터 저자는 더 정확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비장애인의 언어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게 많기에 그는 새로운 글쓰기를 더 갈구하게 된다.
그는 노르웨이라는, 비교적 복지 체계가 잘 갖춰진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지원 기관의 도움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증여자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수취인은 그대로 받지 않는다는 이 말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오래도록 남는 문장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낙인찍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정성 들인 체계와 도움을 거부할 이유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이 한 문장은 압축한다.
그는 “내가 태어난 조건 자체가 나를 위협”하는 삶을 계속 살아오고 있다. 그러한 삶은 투쟁이니 더 윤리적이어야 할까. 게다가 그는 저자나 학자로서 장애인의 ‘대표성’을 어느 정도 담지하고 있으니까? 끊임없는 자기 상승을 꿈꾸며 도모하고 있는 저자는 소년 시절 장애인 캠프에 참여했다가 자기보다 훨씬 더 중증인 또래 장애인들을 방관자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오히려 “식욕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다니던 학교에서 자신 말고 유일하게 휠체어를 탔던 다른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말한다, 자신은 ‘도덕’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서로 개인적인 도덕적 책무 속에서 상대를 인지한다. 낙인찍힌 이들은 눈치를 본다. 그들은 과도하게 순종적이거나 친절할 때도 있다. 그들 중 일부는(혹은 상당수는) “더럽혀진 속성을 소유하였거나, 어떤 속성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수치심이 발생”2) 한다. 낙인찍힌 이들은 늘 가시적인 시간을 산다. 문제는, 그들의 시간은 그렇게 노출되어 흘러가는데, 정작 현실에서 그들의 공간은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추는 부재와 비공간,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공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사실 이 짧은 글을 쓰는 데 2주가 걸렸다. 어쩌면 이 글은 여전히 불가능을 향한 글쓰기인지도 모르며, 아무런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힘을 북돋워준다. “그것은 (…) 나만의 문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삶을 함께 꾸려나가야 한다.”
참조
- 어빙 고프먼, 『스티그마: 장애의 사회심리학』, 윤선길 정기현 옮김, 한신대학교출판부, 2018(개정판), 38쪽
- 앞의 책,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