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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관찰자의 일기

쏟아지는 초록빛 여름

  •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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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천국

여름은 초록빛이 쏟아지는 계절입니다. 다양한 녹색 잎사귀들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지요. 봄에 조금씩 올라오던 연둣빛 새싹에 관심을 두던 우리는 주변을 가득 채운 녹색식물들을 어느새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받아들이죠. 여름이 주춤하고, 잎사귀들이 광합성 활동에 지칠 때 즈음 초록빛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가을이 시작되면 나타나는 노란빛, 붉은빛에 우리는 식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지요.

식물의 초록빛은 엽록소의 색입니다. 엽록소는 광합성을 하는 기관인 엽록체에 있는 색소입니다. 예전에 저는 식물의 엽록체만 분리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포에서 소기관으로 존재하는 엽록체를 깨뜨리지 않고 분리해 내는 건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는데요. 세포는 깨뜨리면서도 그 안에 소기관인 엽록체를 깨뜨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험은 2~3일 동안 차가운 얼음과 여러 화학물질을 이용해 엽록체의 싱싱함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다음 원심분리를 하면 같은 무게의 소기관들이 층을 이루게 되는데요. 엽록체들도 하나의 층을 이루게 됩니다. 이때 다른 소기관들과 다르게 엽록체는 눈으로 잘 구별할 수 있는 층을 이루는데요. 그 이유는 투명한 다른 기관들과 달리 엽록체 층이 선명한 초록빛을 띠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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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덩굴초롱이끼의 세포와 엽록체들 ©Kristian Peters

엽록소, 초록 피

식물의 상징색, 초록색의 근원인 엽록소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엽록소에는 a, b, c1, c2, d, f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식물에는 엽록소 a와 b가 풍부하게 있지요. c는 조류에, d와 f는 시아노박테리아에 많습니다. 각각의 엽록소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분자구조를 가집니다. 포르피린환이라는 고리 모양의 구조가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구조가 우리 피의 헤모글로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환 구조의 중심에 엽록소는 마그네슘, 헤모글로빈에는 철이 있지요. 그런 차이로 식물 세포는 초록색, 인간의 적혈구는 붉은색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분자구조를 보면 식물이 초록색 피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생물 중에는 파란색 피를 가지는 생물도 있습니다. 오징어, 게, 문어 등 해양무척추동물이지요. 이들은 헤모시아닌이라는 분자를 가지는데 이것은 엽록소나 헤모글로빈처럼 환 구조는 없으나 구리 원소를 가져 푸른색을 띠게 됩니다. 생물들의 초록 피, 붉은 피, 푸른 피의 원리가 신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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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제비고깔 ©Hoher Rittersporn

엽록체, 그리고 다른 색소체들

식물 색소에는 엽록소 외에도 카로티노이드, 플라보노이드, 안토시아닌, 크산토필 등 다양한 색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노란색, 붉은색, 보라색 등에 관여하지요. 엽록소는 엽록체에 있는데, 이들 색소는 어디에 있을까요?

식물 세포에는 엽록체와 비슷한 색소체가 더 있는데요. 백색체와 유색체(잡색체) 등입니다. 백색체는 말 그대로 색소가 없습니다. 이들은 광합성과 관련이 없는 뿌리나 종자에 포함되어 단백질, 전분 저장 등에 도움을 주지요. 빛에 노출되면 엽록체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엽록체에서 엽록소가 사라지면 백색체가 될 수도 있지요.

유색체는 꽃, 열매, 단풍 등에서 발견되는데 그 속에 노란색, 붉은색을 내는 색소인 카로티노이드, 크산토필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엽록소가 아닌 이런 색소를 많이 가지는 색소체를 유색체라 부르는 것이죠. 사실 엽록소가 가득한 잎에도 노란색이나 붉은색을 내는 식물 색소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엽록소가 사라져 숨어있는 노란 색소와 붉은 색소가 보이게 되지요. 우리는 단풍을 보면 새롭게 나타난 색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엽록소에 가려졌던 다른 식물 색소들이 그제야 빛깔을 자랑하는 것이죠. 엽록소가 많이 사라지면 엽록체는 유색체로 바뀌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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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팥배나무 열매사진: 필자제공

어떤 색소들은 색소체가 아닌 액포에 있습니다. 액포는 식물 세포에서 최대 80 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기관으로 여러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중 색소를 저장하는 기능이 있어 플라보노이드, 안토시아닌 같은 색소를 저장하지요. 액포에 있는 이런 색소들은 청색, 자주색, 보라색 등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잎파랑이의 계절

하나의 세포에는 최대 100개의 엽록체가 있습니다. 단세포 조류에는 1개의 엽록체가 있기도 하지요. 이 초록색 엽록체들이 세포 속에 점점이 모여 그 수많은 점으로 인해 우리가 식물을 초록색으로 보게 됩니다. 식물 색소들은 식물 세포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거나 녹아있지 않고 체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또 색소마다 기능이 있습니다. 엽록소가 빛에너지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고, 카로티노이드가 엽록소를 도우며 강한 빛으로부터 손상을 막는 것처럼 말입니다. 식물의 색은 모두 이유가 있고 역할이 있으며 제자리가 있는 것이죠.

엽록소의 순우리말은 잎파랑이인데요. 잎을 푸르게 만드는 색소에 맞게 참 귀여운 이름이지요. 접미사에는 형용사에 붙어 사람처럼 만드는 ‘-이’가 있습니다. 똑똑이, 투덜이처럼요. 잎파랑이도 그렇게 의인화된 것처럼 느껴져 친근합니다. 잎에서 열심히 일하는 작은 요정 같다고 할까요? 녹색이 범람하는 여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잎파랑이들을 상상하며 식물과 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