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는 책 읽기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아끼는 후배가 가까웠던 동료들과 말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일이 발단이었을까, 그는 며칠 전 직장을 그만뒀다. 나 또한 A와 말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우린 원래 대화를 많이 했고 퇴근 후에도 같이 식사한 게 여러 번이다. 지금은 둘 사이에 침묵의 돌이 놓여 있다. 현실이 힘들면 잠은 도피처가 된다. A와 내가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되돌아가니 꿈속의 나는 기쁘나, 거기엔 회복의 실마리가 어디에도 없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이런 기억을 흐릿하게 하기는커녕 더 선명히 하면서 스스로를 반복해서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 아닐까?’
자기 비하를 일삼는 자 옆에는 누구든 있기를 꺼린다. 자기 비하는 자기애의 순환 고리 속에 있기도 한 데다, 비하라는 것이 윤리적 반성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는 자기 직시가 내포할 만한 발전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런 와중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 “당신은 별것 아닌 존재다”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증해준다. 독자는 장편소설 한 권을 읽어냈다는 성취감은 얻을 새도 없이 자기 비하에 빠지고, 독서 전보다 독서 후의 자신감이 하락해 있어 주변 사람들이 내 모습을 알아차릴까봐 겁을 내게 된다.
책은 일인칭 화자 토니 웹스터의 10대 시절에서 시작하지만, 이것은 회상으로, 그는 현재 노인이다. 별로 매력 없어서 한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노인. 식당에서 젠체하며 큰소리로 떠드는 할아버지나, 대중 강연에 참석해 강연자 교수의 이름을 자기 동생인 양 부르며 거들먹거리는 노인, 서점에서 신간을 침 발라가며 들춰보는 노인, 조용한 숲에서 스피커 라디오를 켜 분위기를 흩뜨리는 노인……. 토니 역시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옹졸한 데다 허세도 심한 편이어서 그를 보며 현실 속에서 마주친 노인 몇몇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노인들의 인상은 강렬히 남을까, 그것도 부정적인 모습으로. 이는 아마도 현재의 나와 그 노인은 가장 극적으로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과연 진실일까. 그 노인이 미래의 내 초상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한때 좋았지만 끝까지 못 가고 끝장난 관계는 나이 든 이에게 자책할 빌미를 마련해준다. 내 쪽에서 먼저 끊어냈더라도, 헤어져서 홀가분했더라도 토니처럼 이런 말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과소평가, 아니 계산착오를 저질렀으니, 시간은 그들이 아니라 나를 비판하고 있었다.”
비교 평가의 시선 아래 놓이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내 눈이 거울을 향하기보다 거의 늘 창밖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들의 시선도 그들 자신보다는 창밖의 나에게 꽂혀 있다. ‘시선의 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상승과 도약을 꿈꾸는 인간 본성상 쉽지 않다. 그 같은 시선을 의식하며 우린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추락하기도 하는데, 토니에게 그런 비교 대상은 에이드리언이다. 무엇보다 철학적 사고가 뛰어나고 역사 인식이 비범해 앞을 폭넓게 조망하던 에이드리언과 달리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다”. 이렇게 깜냥이 얼마 안 되는 인간은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말년의 감정을 자기 정당화나 변명, 후회에 쏟아붓게 된다.
흔히들 하는, ‘어차피 사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말에 나는 공감 간 적이 없다. 삶에서 쌓는 작은 덕이나 저지르는 소소한 잘못은 차곡차곡 저장돼 질적 차이를 가져오고, 되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만든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매년 전 세계적으로 수치화되고, 우린 자신의 감정을 행복/비탄, 만족/불만 등 거친 개념 몇 가지로 추상화하는 데 익숙하지만, 일상과 감정이 쌓여 기억을 강화하는 가운데 노년의 회상은 또 한편 발이 달린 것처럼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면이 있다. 자기혐오가 없던 사람도 살면 살수록 스스로에게 자신 없어지기 마련으로, 그런 감정은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내게로 다가온다. 그런 것은 물리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고 한동안 침잠해 허우적대다 샛길로 빠져나오고 들어가길 반복하게 된다.
“어쩌면 인성이란 (…)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청년기]만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결혼해 딸을 하나 낳고, 이혼하고, 노인이 되어 다시 첫사랑과 재회했건만 그녀는 나름 자족하며 살아왔던 토니의 삶이 허상임을 통렬히 까발린다. 삶은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으며, 문 닫아 걸고 혼자 독방에서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죽어간다 해도 죽음 이후에 반드시 사회 속으로 끌어내져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된다. 굳이 타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타인 모두를 대변해 그 심판관이 될 수 있다. 토니가 말하듯, 가령 칠십 평생의 모든 것이 ‘우리 자신’으로만 귀착된다면 이 얼마나 좁고 두려운 삶인가. 물론 내 안에는 수많은 타인이 기거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자기화된’ 타자여서 누구든 질식할 듯한 자신을 견뎌야만 한다.
이 책은 끊임없이 기억, 회상의 진흙길을 걸어 발이 더러워지게 만든다. 더럽혀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름 가볍고 유쾌한 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던 토니는 심연의 공포 속으로 빠져든다.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 테고, 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흑역사’ ‘이불킥’이란 단어로 경쾌하게 치부하고 넘어가지만, 만약 나의 과거가 천성의 모자람이라든가 혹은 자신의 부도덕함과 결부된 것이라면 심연의 공포는 피할 도리가 없다.
한편 과거에 자신이 피해자였던 적이 있다면, 기억의 폐쇄회로 속에서 피해의 기억은 돌처럼 단단해진다. 나는 2년 전 18~19세 때의 학교폭력 경험을 26년 만에 다시 마주했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면서 보름 동안 몸을 벌벌 떨었다. 기억의 회로를 터준 것은 뉴스로 보도된 연예인들의 학교폭력이었고, 놀랍게도 기억의 재생 버튼은 언제 어디서든 눌러질 태세를 하고 있었다. 나의 기억은 때로 나를 보호하기보다 나를 다그치고 나를 내몬다.
내가 편집하는 에세이들의 저자 여럿은 모두 회상에서 비롯된 고통을 어쩌지 못해 현재를 온전히 글쓰기에 쏟아붓는다.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몫은 언제나 잘 잊어버리는 가해자의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선명해지는 피해자의 것이다. 친족성폭력 생존자 K는 가족의 성폭력 기억뿐 아니라 그걸 글로 썼지만 여러 출판사로 부터 거절당한 기억까지 같이 안고 있다. 편집자들이 거절한 이유는 대부분 “세상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였다. “저는 매일 주변 공기에게, 가로수에게 또는 지나가는 전철과 울며 기댄 버스 창가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했어요.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도록.” K가 내게 보내온 휴대폰 문자처럼 그는 파괴의 화신인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쏟아부어 미래의 오솔길을 내고 있다. 한 줌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그녀가 보유한 자원은 오로지 현재의 시간뿐이다. 가해자는 기억을 빼앗았고, 현재의 시간 속에도 거할 뿐 아니라 미래조차 내주지 않으려고 그녀에게 맞서고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인간은 삶에서 모든 변화가 닫히는 그 지점을 향해 시계처럼 초와 분을 축적하며 뚜벅뚜벅 걸어간다. 아직 젊은이들은 이 소설이 드러내는 바를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40대 중반의 나 역시 노년의 감정을 추측하며 읽었다. 노년이 되기 두려운 마음에 기억을 잘 간수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게 바로 함정이다. 기억은 관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좁다란 자아가 그림자처럼 생의 발자국을 계속 뒤쫓아오며,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말을 여러 번 속삭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