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자아를 치유하는 형식 되찾기
-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언제부턴가 타인을 대할 때 겹을 하나 지닌 사람들이 좋아졌다. 막이라고 해야 할까. 적나라하고 즉각적인 사회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진심을 내보이려면 점점 형식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한 어른과 아랫세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A는 술기운을 빌려 거친 말들로 어른을 면전에서 비판했다. 그 내용에 설령 동조할 사람이 있을지언정 우리는 그가 취한 형식에 뜨악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거기에 부드러운 살은 없었고 뼈만 있었는데, 그 뼈는 그 어른만이 아니라 우리 뺨을 때린 듯 일행은 조용히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그 후로 내용과 상관없이 직접적인 말과 행동이 인간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점점 느껴왔다.
서양인은 물론이고 한국인도 종종 일본을 동경해 마지않는 이유는 그들이 길을 에둘러갈 줄 알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사회적으로 폐단을 낳기도 하며, 일본인의 이런 점을 싫어하는 외국인도 제법 있다). 역사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생애에서 중요한 예식들은 허례허식이라 불리고 비용과 시간을 따져 하는 일이 되면서 마침내 외부 문명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말레이제도나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들조차 오랜 역사를 이어온 장례식 절차에 들어갈 물질과 시간을 아까워하며 망자를 서둘러 떠나보내기 시작했다. 유령도 저세상 가는 길을 재촉해야 하고, 이 땅에 태어나는 이도 산모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는 게 오늘날의 사회다.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은 예가 밴 몸가짐을 갖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리추얼’의 서사적 과정을 복원시켜준다. 알다시피 리추얼은 형식이다. 그런데 그 ‘형식’이 타자를 내 집안에 들이도록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다. 인간 삶의 단계에서 중요한 통과의례들이 있지만, 이 책은 특히 죽음의 의식에도 중요한 장을 할애한다.
나와 가까운 어른 K는 얼마 전 모친상을 당했다. 우리 일행은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에도 K가 많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마음이 몹시 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돼 K는 빈소를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단톡방에서만 이야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 K를 위로한답시고 전화를 걸었는데, 위로하기는커녕 배턴 터치하듯 그와 한 통화 속에서 예기치 못한 부드러움과 위로를 거꾸로 전해 받았다. “장례에서의 슬픔은 객관적 느낌, 공동 느낌이다. (…) 장례에서 슬픔의 진짜 주체는 공동체다.” 우리 일행이 공동체라고 할 순 없더라도 서로 감정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사적인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아 참 다행이다. 한병철이 말하듯 “장례식은 니스칠처럼 피부 위에 덮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피부가 참혹한 슬픔의 화상을 입지 않게 보호해준다.”
태양이 물러나는 밤에 우리 영혼은 낮고 어두운 것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인지 죽음에 대해 더 허용적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밤중에 문득 깰 때 아니면 꿈속에서 죽은 이들을 더 잘 떠올리거나 만나게 된다. 딱히 내 지인 중에 저세상에 간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일간지 부고 기사에서 본 인물 혹은 내 지인의 가족이 잘 갔으려나 하고 마음속에 떠올린다. 그리고 슬픈 충격은 몇 단계 건너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도가 세다.
한편 리추얼은 종교 의식에서 흔히 관찰된다. 어린 시절 안식일이라 해서 일요일 하루를 교회에서 보냈던 나는 뭘 잘 모르긴 해도 성경에서 접한 유대인들의 예식은 좀 알았던 것인지, 그때 다녔던 개척교회의 간소화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예배가 의아하게 여겨졌다. 당시 한국 교회들은 낮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오전 예배를 드리고 다 같이 밥을 먹은 뒤 곧바로 오후 예배를 드렸다. 아마도 집에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저녁 여유 시간을 앗아가니 어른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던 듯하다. 하지만 어린 내게는 오후 예배를 ‘해치우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설교 끝날 즈음 식사 담당 집사님이 일어나 기도 중에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그날의 메뉴 냄새를 풍기는 것이 불경하게 느껴졌다. 예배 공동체는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긴 하나, 음식 냄새는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머릿속에서 회개와 다짐을 하기보다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상 제사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여서, 내일의 노동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제사 시간은 자정에서 퇴근 후로 앞당겨졌으며, 날짜도 편의대로 바꾼다. 하지만 예식에 가속을 허용하는 것이 쉽게 생각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철학자 김영민도 『집중과 영혼』이란 책에서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수십 년간 철학자로서 공부하고 글을 써왔지만, 어느 날 글쓰기를 멈춘 채 4년여 간 오로지 읽고 공부하는 데만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집중과 영혼』인데, 이 책 내용이 『리추얼의 종말』과 통하는 점이 있으니 한병철식으로 제목을 바꿔 말하자면 ‘주의력과 종교’다. 한병철은 “모든 종교적 실천은 주의력 훈련”이라면서, 이런 것이 사라진 오늘날 가장 흔히 관찰되는 질병은 바로 주의력결핍장애라고 본다. 즉 현대인은 무언가 맺고 끊음이 없이 삶을 물 흐르듯 연쇄적 습관 상태에 둠으로써 “연쇄적 지각의 병적인 극단화”가 나타난 이 질병을 앓게 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과적 질병을 치유하고자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오히려 외적 형식을 취해보자. “외적 형식이 내적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란 말은 꺼내지 않고 중심이 텅 빈 형식의 극진함을 추구하는 일본의 다도나 심지어 일본인의 청소하는 자세를 외국인들은 눈여겨봐왔다. 몸짓을 하다보면 오히려 감정이 생긴다. 한병철은 상냥하거나 호의적인 몸짓을 흉내만 내도 기분이 좋아지고 복통이 완화된다고 말하지만, 한편 이러한 ‘모방’이 미메시스에 이를 수 있는지는 좀더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크리스토프 불프와 군터 게바이어는 『미메시스』라는 책에서 모방에 그친다면 그것은 ‘주체’ 구성을 이뤄내는 미메시스가 아니라 단지 흉내라고 말한다).
어쨌든 한병철의 책은 자아에 갇히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것은 굉장히 치유 효과를 발휘한다. 심리 치유라기보다 존재론적 치유다. 형식을 되찾아 타인을 자기 집안에 들일 때 자기관련성의 대표적 질병인 우울증은 사라지고 우리는 장소적 존재로서 빛을 담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