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시대와 엇박자를 낼 것”
-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청년과 중년의 사람들은 말년을 ‘대상’으로 바라본다. 특히 청년은 노년의 지성을 경외하면서도 이따금 왜 저런 식으로 쓰거나 말할까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정점을 지나 왜 그와 같은 말년이 되었을까를 곱씹게 하는 몇몇 거장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말년을 완성의 단계로 보지 않는다. ‘말년의 양식’이란 용어는 사실 테오도어 아도르노에게서 가져왔는데, 성숙함이나 초현세적 차분함과는 다를뿐더러 노쇠의 결과일 수도 없다. 말년의 양식은 한마디로 시대착오, 예외,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이다. 난국에 처해 화해 불가능을 보여준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장 주네, 람페두사, 모차르트 등이 책의 주인공이다.
말년성은 ‘망명성’으로 치환될 수 있다. 즉 현재 속에 거하지만 현재에서 벗어나 있는 시대착오성이며, 화해 불능이다. 사실 우리는 “한 인간의 삶의 건강이 얼마나 시간에 잘 호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엔 때가 있어 젊은이의 행위를 노인이 하면 부적절하거나 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이드는 순응, 조화 따위에 관심 없다. 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이다. 그러니 독자인 우리도 경력을 쌓아 완성을 이루는 가운데 조화로운 말년을 기대하기보다는 독자와 관객을 당황케 하고 불안에 빠뜨리는 이들을 따라가보자. 가령 아도르노에 따르면, 베토벤의 말년의 음악을 들을 때는 임박한 예술가의 죽음을 떠올리면 음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다. 물론 죽음은 바투 다가와 있지만, 주목할 것은 “장식적인 트릴과 종지, 피오리투라” 같은 장치, 미적인 것의 권리다. 31번 소나타에서 오프닝 주제가 투박하게 제시되고 트릴 이후 “둔탁한 반복 음형의 반주”가 나오자 아도르노는 그런 원시성이 말년의 특성이라고 짚어낸다. 마치 미완성인 듯하고, 종합은 없이 몸부림치며 포착하지 못한 흔적만 남는다. 그것은 다른 말로 ‘주관’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부고를 들을 때는 물론이고 일흔이 넘어 100세까지 사는 창작자들을 볼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젊은이 같은 원기 왕성함, 세상과 불화하지 않는 모습, 인생의 멘토 같은 너그러움이다. 이를테면 철학자 김형석이 100세 넘어서까지 조화로워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을 대중은 롤모델로 삼는다. 만약 말년의 모습이 모순과 혼란, 반복, 미완숙이라면 우리는 “그 노인네가 어쩌구저쩌구”라는 말을 내뱉을 것이다. 나는 작가 몇몇의 말년성이 세상과의 ‘화해 불가’로 치달을 때 좁쌀만 한 이해심과 일반 대중의 반응에 대한 심려로 그 어긋남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적이 몇 번 있다. 책이나 예술이 추구하는 바가 꼭 조화로움은 아닐 텐데, 끈질긴 반복과 까탈스러움과 불화를 접하다보면 이내 좀 더 매끄러운 길로 가려 한다. 파국이 두려워서. 아도르노와 같은 말년성을 보인 작가 역시 ‘통일성’이라는 전체를 공격하며 “전기적, 서술적, 일화적 연속성”을 파괴한다. 두려운 건 이 세 단어를 편집자들은 자주 금과옥조처럼 여긴다는 점이다. 연속성의 흐름, 짜임새 있는 서술, 전기적 사실은 너무나 소중하지 않던가.
사이드가 이 책에서 다루는 말년성의 인물들은 반복, 퇴행, 추상과 같은 단어와 어울린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 등이 바로 말년의 작품이다. 굴드 역시 슈트라우스의 말년성을 꿰뚫어보는데, 그것은 “시간 순서대로 음악이 발전해가는 단순한 도식을 당당히 내던진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인과적이지 않고 연대기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말년의 작품들은 유행과 거리가 있기에 현실이 잡스러운 돌들로 가득하면 이들 작품은 침묵한다. 예컨대 슈트라우스는 역사를 대하는 19세기적 태도와 거리를 두었다. 당시는 역사가 보편적 서사를 체현한다고 생각하는 게 주류였는데,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서 신화, 집단적·종족적 기억 등이 역사 체계에 복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역사가 보편 서사를 대표하는 것을 거부한 책은 또 있다. 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봄의 제전』은 대부분의 전쟁사가 군사 전략과 전술의 텍스트를 참조하는 것과 달리 문학과 예술 텍스트를 직조해 전쟁사를 완성했다. 거기서는 작품과 편지 자료가 줄거리의 바탕이 되는데, 국가적 주체와 달리 이들 사사로운 텍스트가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가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고, 그렇게 서술된 텍스트는 전쟁을 현대가 탄생되는 정신사적 전환점의 하나로 조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이드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아도르노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구석이 있”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역행성을 띠지만, 이것이 바로 슈트라우스의 말년적 특징이라고 짚어낸다.
이 책으로 죽음, 노년을 읽으려 한다면 독자는 실패할 것이다. “말년의 양식에는 부르주아의 노화를 두고 보지 않고 계속 거리두기와 망명과 시대착오의 감각을 고집하려는 긴장이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 특히 아도르노와 같은 작가는 독자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한발의 양보 없이 어떤 움직임, 진보도 ‘황산을 뿌려대는 뿌리개처럼’ 공격해댔다. 즉 성숙과 말년은 어긋난다.
말년의 작품이 화해 불능과 충돌성이라 하여 미학적으로 완전성이 덜하리라 생각하면 오해다. 장 주네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주네라는 사람은 자신을 거의 버리는 포용력, 사물을 집중해서 꿰뚫어보는 힘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서구 지식인 대부분이 유대인 편에 설 때 그는 아랍인을 편애하는 당파적 감정을 내보였는데, 이런 감정은 그의 말년의 작품에 주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나는 아직 주네의 작품을 읽지 못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의 『사형수』를 봤다). 그 감수성이란 길들여지지 않는 독특한 무엇이지만, 투쟁하고 정체성을 와해시키려는 주네의 시도는 가장 단정하고 정연한 프랑스어 문체로 표현된다. 이런 주네를 만난 것은 사이드에게 행운이었다. 만약 그를 그때(1970년) 만나지 못했더라면 사이드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바를 영영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네와 관련해서는 특히 정체성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늘 획득하려는 것은 정체성이다. 하지만 주네가 보기에 정체성은 “더 발전한 사회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결된 사람들을 짓밟고 그 위에 자신을 부과하는 과정”이다. 주네는 우위에 서길 거부하며 관광객을 자처한다. 이는 정체성 정치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입장이기도 한데, 사이드는 주네를 옹호하는 한편 카뮈를 비판한다. 제국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카뮈의 작품은 “겁을 집어먹은, 그래서 너그럽지 못한 마음의 필사적인 몸부림”일 뿐이었다. 이 책은 주네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 귀에 대고 속삭인다. 서사와 기억에 의심을 품어! 강렬한 미적 경험을 무시해!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엔 아도르노의 숨결과 인식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아도르노가 말년성을 먼저 탐구했고, 사이드가 그를 추종하며 아도르노 자신을 포함한 거장들의 말년성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성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성인들의 말년성을 고찰한 데다 음악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그 음악들 역시 뛰어난 논리성을 음률로 구성해낸 것이기에, 쉽지 않은 작가들을 포기하지 말고 그들이 끝까지 밀고 나가려 했던 바를 독자도 함께 따라가보도록 권한다. 특히 회귀나 수렴, 진실 같은 것 없이 마지막까지 마찰과 불협화음으로 엇박자를 내는 이들의 작품은 삶과 죽음이 한 쌍을 이뤄 인간의 기저를 구성할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 내재된 말년성을 예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일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