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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관찰자의 일기

식植 물物, 서 있는 생물

  •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www.hyew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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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삼나무숲

식물이 건축물이라면?

식물과 똑같은 모양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식물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건축물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는 828m 높이의 빌딩입니다. 부르즈 할리파의 너비만큼 줄기가 굵어지도록 식물을 확대한다고 상상해 보면 분명 많은 식물이 부르즈 할리파보다 키가 클 겁니다. 갈대는 아주 얇은 줄기를 가지고도 높이 자라납니다.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지요.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갈대 모양의 건축물이 있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일 테지요. 어떻게 그 가는 굵기로 그렇게 높게 자랄 수 있는 걸까요? 게다가 식물이 더 놀라운 이유는 식물은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이지요.

자연 속 완벽한 건축물

식물이 가는 굵기에 비해 너무나 높이 자라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 식물의 건축 능력이 새삼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 갈대나 대나무처럼 줄기 속이 비어있는 식물들은 다른 식물보다 더 적은 면적으로 식물체를 지탱하고 있는 셈입니다. 식물의 줄기에는 물관과 체관이 있습니다. 물과 영양분을 수송하는 살아있는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식물세포는 세포벽을 가지고 있어 동물세포보다 단단하게 모양을 지탱합니다. 그러면서도 세포간의 물질 이동이 가능하도록 원형질연락사라는 통로도 만들어놓았죠. 줄기 표면은 외부 환경을 잘 방어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털이나 가시 등도 제작해 놓았습니다. 식물은 줄기에 커다란 잎과 가지각양의 꽃, 무거운 열매까지 건축합니다. 가는 줄기 마디마다 잎을 펼치고 줄기 끝에 커다란 꽃을 피워낸 모습을 그대로 건축물로 만든다고 상상하면 어떨까요? 혹은 무거운 열매를 잔뜩 매단 모습의 건축물은 또 어떨까요? 그렇게 상상해 보면 지금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그런 건축물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식물은 스스로 성장하며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갑니다. 식물은 완벽한 건축물이면서 스스로 뛰어난 건축가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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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사그라나 파밀리아 성당 ©Roertgombos

식물 바이오아키텍쳐

요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 건축물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이오아키텍쳐(bioarchitecture)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거나 자연의 구조와 생태를 모방한 건축을 말합니다. 식물을 건축에 도입한 아이디어를 살펴보면 수직 정원, 벽면 녹화, 에코하우스, 플랜테리어 등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대개 건축물 주변이나 표면을 식물로 꾸며 싱그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도심의 녹지 비율을 높이는 방법이지요.

그러나 어떤 과학자와 건축가들은 식물의 구조적 특징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태적, 기능적 특성까지 건축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식물의 증산작용을 이용한 냉방, 식물의 물 수송 방법을 적용한 건물 내 물 수송, 지진을 감지해 반응하는 신호 기전 적용, 수분 유무에 따른 식물체 구조 변화 등이죠. 예를 들어 영국 헐 대학교(University of Hull)의 자연과학자 롤랜드 에노스(Roland Ennos)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요. 특히 나무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그 원리를 풀어낸 연구들이 눈에 띕니다. 나뭇가지와 덩굴의 역학, 나뭇가지의 갈라짐 각도와 강도, 나무 종에 따른 부러짐과 굽힘 정도 및 해부학, 하중을 견디는 나무뿌리의 형태와 변형률 등입니다. 이런 과학자의 연구는 건축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지요.

건축가에 의해 물리적 특성을 실제 적용한 건축물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1882년 건축을 시작한 스페인의 사그라나 파밀리아 성당은 숲을 닮은 기둥을 포함해 여러 자연의 형태를 모방했지요.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 전시회가 열리는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박물관은 연꽃을 형상화한 건물입니다. 박물관 취지와 꼭 어울리는 모양새이지요. 친환경 건축가로 유명한 빈센트 칼보(Vincent Callebaut)가 제안한 수상 에코폴리스는 미래 기후온난화와 해수면상승을 대비한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물에 떠 있는 수련 잎에서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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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과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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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좌) 필자 제공, (우) ⓒPierrick lemaret

살아있는 건축물

식물 구조는 종에 따라 다르며 엄격한 유전적 통제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빛, 온도, 습도, 영양 상태와 같은 환경 조건의 영향으로 그 형태를 조정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유전적 정보에 따라 조상의 형태대로 정확히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줄기에서 잎이 나는 모습만 생각해봐도 종마다 다릅니다. 어떤 식물들은 잎이 어긋나서 하나씩 나고, 어떤 식물들은 두 개씩 마주나거나 나선형으로 돌려나기도 합니다. 잎과 잎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고 면적과 각도를 생각해 배열하지요. 오랜 진화를 통해 완성한 유전 정보대로 형태를 만듭니다. 식물이 좋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아주 긴 시간 준비한 설계 때문이겠지요.

식물의 구조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구조가 자신의 생존, 번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구조, 꽃가루를 잘 얻을 수 있는 구조, 씨앗을 잘 퍼뜨릴 수 있는 구조 등 각각의 목적에 맞게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았죠.

자연의 설계도

가느다란 줄기 끝에 화려하고 큰 꽃을 피우는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산들거리는 모습이 새삼 신비합니다. 거침없이 뻗어나간 대나무와 수많은 가지를 낸 느티나무, 줄기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도 참 멋진 건축물들입니다. 우리 주변에 흔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식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초록이 무성해지는 초여름, 놀라운 식물 건축물들을 감상해 보는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