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인간을 부러뜨려 공동묘지로 돌려보내는 전쟁의 시간들
-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 책을 누가 요약할 수 있을까. 몇몇 장면을 들어 누가 감히 전체를 보여줬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을 막 끝낸 독자는 다음에 읽을 책이 지금의 책보다 더 낫길 기대하는데, 『태고의 시간들』을 읽었다면 한동안 다음 책을 고르기는 힘들 것이다. 수많은 양서조차 왠지 이 책 앞에선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가 신이 되는 책이다. 폴란드에 있는 ‘태고’라는 가상의 마을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최전방이 되면서 주민들이 겪는 시간을 독자가 낱낱이 측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 거하는 동식물, 떠도는 혼, 인간을 수호하는 천사, 나아가 신까지도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 이름에 ‘시간’을 붙여 펼쳐나가는 이야기이기에 탄생과 죽음이 담기는 것은 물론, 각자가 겪는 설렘, 깨달음, 추락도 기록된다.
‘시간’으로 짜인 이 책의 포문을 여는 것은 1914년 여름이다. 바로 현대의 탄생을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이다.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독가스가 살포돼 사람들 눈이 터져나가는 와중에 태고 마을 땅은 러시아 군인과 독일 군인이 싸우는 전장의 한복판이 된다. 이해 여름 태고에 나타난 크워스카라는 맨발의 소녀는 단번에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녀는 벌판에 남은 이삭을 주워 먹고 가을엔 감자를 훔치며 겨울엔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몸을 대준다. 하지만 걸식하는 처지일지언정 스스로를 낮추진 않는다. 남자들이 개떼같이 달려들어 성관계를 요구할 때 그녀는 바닥에 눕는 걸 거부한다.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 보통의 인간들이 바깥세상의 지식을 끌어와 하나둘 자기 것으로 덧붙여나가는 것과 달리 크워스카는 외부 지식을 자기 존재 속에 온전히 녹여 넣는다. 그녀는 냄새나는 사내들, 음습하고 퀴퀴한 자연환경과 술집 주변에서 목격하는 것을 자기 몸속으로 빨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배움의 장이었고 그녀는 마침내 졸업장으로 부풀어 오른 배(아이)를 수여받았다.
언뜻 창녀처럼 묘사되지만, 시간이 흐르고 축적되면서 작가가 크워스카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성녀와도 같은 삶이다. 그녀의 젖가슴이 불자 사람들은 그 젖줄에 자기 신체를 갖다 댔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액체로 눈병, 사마귀, 종기, 피부병을 고쳤다. 신은 비천한 그녀에게 신비의 모유를 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현현한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치료받은 자 모두 세계대전에 참전해 죽으며, 신은 여기서도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전쟁의 시대에 사람들 혀를 점령하는 주제는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다. 러시아 군인 이반 무크타는 한 민간인의 집을 숙소로 쓰겠다며 차지했고, 그 집 꼬마 이지도르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어느 날 꼬마가 신의 존재 여부를 묻자 무크타는 신이 없다고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물컹물컹한 젤리처럼 아직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는 신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혼돈의 세계 속으로 내던져진다. 이윽고 사방이 텅 빈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고, 그곳에 생존하는 모든 것은 외롭고 허무하며 무기력해 보였다. “냉기와 슬픔이 사방에 만연했다. 모든 피조물이 뭔가를 끌어안고, 뭔가에 들러붙고, 사물을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기를 간절히 갈망했지만, 결과는 고통과 절망뿐이었다.” 신을 잃어버린 아이는 시름시름 앓더니 몸져누웠고, 그 후 죽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신은 완전하지 않다.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자기 확신이 없다. 신은 인간들을 보며 거울처럼 자기 모습을 되비춰보다가 혼란에 빠진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그는 인간이 겪는 삶과 종말을 함께 통과하기에, 인간이 유혹하면 같이 침대 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발견하고, 노인의 침상에 들어가서는 인생무상이나 죽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인간의 일을 하나둘 제 것으로 삼는 신은 거미줄에 붙들린 벌레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꽉 붙들려 그 자신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신을 일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마치 다신론자처럼 여러 모습으로 보여주는데, 작가는 신이 ‘여자’라고 힘 주어 말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세계를 여성의 관점에서 재편하고 동식물을 인간과 같은 선상에 두거나 혹은 우위에 놓기도 하며, 육체와 영혼의 세계를 뒤섞는 작품 세계로 잘 알려져 있다(그녀의 작품에서 동물은 끊임없이 신을 인지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와 비슷한 신앙심을 품고 있다). 여성성을 띠는 토카르추크의 신은 “강력하고 거대하고 축축하”다. 이런 신을 향해 또 다른 등장인물 이지도르는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기도를 올리며, 마침내 ‘하느님’의 히읗을 발음하는 순간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다. 소설은 그리하여 단어들의 나열, 연쇄성, 히읗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내달리는데, 신은 이처럼 인간의 언어 속에서 그 가능성이 무한히 확장된다.
다만 낙관은 금물이다. 이지도르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흘러가는 가운데 저자는 그의 노년과 임종을 지키며 가장 먼저 ‘신념, 생각, 추상적 개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즉 평생 공들여 구축해온 인간의 언어와 사고는 죽음이 가까워질 때 제일 먼저 빛바래고 희끄무레해진다. 개념과 생각의 점멸 후 사라지는 것은 감정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사망 선고를 들으면 한 인간이 내부에 가지고 있던 ‘공간’은 산산조각 난다. 이때 인간의 혼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존재가 나타나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라고 꼬드기는데, 그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죽은 자의 세계에도 산 자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해 어정쩡하게 공동묘지를 떠돌게 된다고 소설은 말한다. “인간은 몸이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뛰어난 소설가는 메시지를 직접 발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책이 품고 있는 사상과 역사의 이미지, 상상력은 너무나 풍부해 독자는 절로 몇몇 교훈을 새기게 된다. 그중 하나는 생을 찬미할수록 죽음의 모양새는 더 혼잡스럽고 사나워지리라는 것이다. 이지도르 역시 죽음을 단번에 통과하지 못하고 한 번 깨어났다가 며칠 후 다시 망자들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그건 꽤 고생스런 일이었다. 삶에 햇볕만 있는 줄 알고 열렬히 좋은 것만 바라다가 늙음도 죽음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빗대는 소설의 여러 장면은 마치 나를 향해 겨누는 화살 같다. 삶과 죽음을 등가물로 놓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고, 확신성만 좇는 인간은 위험하다. 시간의 역류를 생각하고, 시간을 공간화할 줄 알아야 인간의 오만함에서 벗어나 동물의 단순성으로, 균류의 영원성으로, 나무의 무경계성으로 더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