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질서와 이름 속에 포함되지 않는 빛나는 존재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지도를 그리고 분류를 하며 계통도를 그리는 일은 아름답다. 축적과 선명함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장을 넘길수록 해체를 향해 달리는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저분함, 엉망의 세계다. 그는 우선 분류학자, 계통학자들의 축적을 허물고, 미국의 우생학적 정책과 과학자들의 업적을 추적해 무너뜨리며, 견고한 이성애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색다른 연애를 하고, 한때는 삶을 헐어 죽음으로 건너가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 책은 몸과 정신이 일체가 되어 세상을 내 안에 심고, 범상치 않은 타인들을 자기 안에 심어 새싹을 틔워내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책의 핵심은 이것이다. 나를 흩뜨려 물고기와 몸을 섞는다. 당신은 물고기고, 물고기는 당신이다. 그것은 계몽을 갈아엎기다. 하지만 이게 퇴보가 아닌 이유는 각자의 세계를 재배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명찰을 떼어내 무명으로 존재하기를, 자유를 얻기를 북돋운다.
나는 10여 년 전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를 편집하면서 ‘식물의 아버지’로 알고 있던 린네의 식물 명명법이 대상의 본질을 외면하고 폭력적으로 질서를 추구한 것임을 처음 알게 됐다. 그는 선대 학자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식물계의 거인이었는데, 그런 거인의 오류를 깨닫자 편집자로서 학자들의 주장과 논증을 밝힌 책을 펴내는 게 두려워졌다. 몇몇 학자가 논문에서 시도한 상징 해석, 몇 가지 증거로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은 때로 모래 위에 짓는 성 같았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체계와 질서, 이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역사 인물이다. 밀러는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그를 쫓아 몸을 이리 뒤집었다 저리 뒤집는 작업을 한다. 조던에게는 존경할 만한 점이 뚜렷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식물에 광적인 호기심을 보였고, 남들이 이런 행위를 경시할 때 그는 아랑곳 않고 “자연 속을 더듬고 다니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돼지를 치고 우유를 짜는 확실성의 세계를 거부하는 담대함이다. 그러한 조던이 제3의 길을 만들어낸 것은 페니키스섬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됐다.
그는 1873년 당대 가장 유명한 박물학자였던 루이 아가시를 따라 젊은 학자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갔다. 이들 남녀는 한데 모여 서로 추파도 던지면서 연구했지만, 조던은 홀로 마음이 다급했다. 이 다급함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데 가령 이런 것이었다. ‘이게 각섬석인가, 아니면 녹렴석인가?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까?’ 조던이 바다 물고기들을 처음 만났을 때 아직 그것들은 이름도 없는 미지의 존재여서 그는 이를 “남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로 여긴다.
이후 학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조던을 눈여겨본 미국 정부는 그를 텍사스, 미시시피, 아이오와 등으로 파견해 미지의 어류들을 밝혀내게 했다. 미국의 지질학자 애니타 해리스가 정부의 돈을 받으면서 로키산맥 이 산 저 산의 돌을 맛보고 지질 구조를 밝혀낸 것처럼. 그럼으로써 구조, 계통도, 이름의 목록이 쌓여갔고, 그들처럼 역사 속 수많은 학자는 계몽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밀러도 조던을 좇아 수직과 체계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 그 세계가 좋은 이유는 죽처럼 뒤섞여 혼돈스런 지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내가 사소하다’는 감각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밀러의 아빠는 가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이처럼 존재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말은 너 좋을 대로 살라는 뜻이므로 마치 아이에게 무한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릴 때 허무주의를 알게 되면 아이는 땅에 발을 딛는 안전한 감각을 얻기 전부터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가끔 자해와 자살 시도도 하면서. 자살은 이 책의 핵심 주제가 아니기에 저자는 자신의 시도를 흘리듯 한 문장으로 적으며 지나가버린다.
다시 조던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는 1883년의 화재, 1906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을 겪으며 역사의 불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수집한 표본이 담긴 유리단지들이 폭발하고 이름 붙였던 라벨들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세계가 묵시록의 세계로 하루아침에 뒤바뀌었으니 바닥에 주저앉아 울 법도 한데, 그는 재빨리 회복해 자신의 무리와 함께 천 가지 새로운 물고기 종을 찾아내 학명을 붙였다. 루샤누스 요르다니, 뮉테로페르카 요르다니…
이런 지식을 향한 열망이 낙천주의와 결합될 때 사람은 점점 확신성의 세계에 갇힌다. 바로 그게 문제다. 모든 것에 명확한 이름이 달린다는 것. 이름이 붙는 순간 이름 너머의 잔여 의미는 없어져버린다. 여러 번 엎치락뒤치락을 한 뒤 저자는 한순간 조던의 노트에서 거짓말 하나를 발견한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마치 자연보다 인간이 더 우위인 듯 설명한 이 문장은 애초에 조던이 스스로 경계했던 바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 운명을 봐주지 않는다는 걸 과학자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때 밀러의 추적은 과학에서 심리학으로 넘어가 조던 시대의 미국인들의 자녀 교육과 사회의 지배 심리를 파헤친다. 이러한 분석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가운데서 우생학자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돌출하기 시작한 한 가지 원인을 밝혀내기도 한다.
저자는 조던이 남긴 모든 기록물을 찾아 읽으면서 이상한 공허가 불쑥 침입하는 것을 계속 느꼈다. 여기서 저자의 혼돈과 불행이 시작된다. 조던과 나 모두 이토록 열정적인데 왜 공허할까? 이때부터 저자는 조던이 집념으로 과학의 탑을 쌓아나간 것을 반대 방향에서 무너뜨리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이성과 추정을 총동원해 한 사람(조던)의 세계가 동심원에서 벗어나 질주하는 것을 추격함으로써 그가 주변 마을과 숲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자신이 믿는 과학 아닌 것의 제거)을 어떻게든 멈춰 세우려는 작전 같다. 조던은 인간이 중요하다고 말한 반면 저자는 “우리 인간은 중요하지 않다”는 쪽으로 달려간다. 물론 이것은 무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사소하다는 감각을 가져야 더 큰 자연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절정을 향해 치닫는 혼돈과 확실성의 대결에서 저자가 찾는 답의 실마리는 위대한 과학자 다윈에게서 발견된다.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은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양에 속지 않는다면 비늘을 가진 물고기나 살갗을 가진 인간은 다르지 않은 존재일 거라면서. ‘물고기’는 단지 언어일 뿐이다.
지도, 질서, 목록, 체계성은 인간의 오만을 입증한다.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거나 비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책은 질서에 대한 경외를 뒤흔드는 지진 같은 책이며, 혼돈의 반격이다. 질서를 많이 만들어낼수록 인간이 맞게 될 혼돈은 더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