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식물의 순간들
- 글 신혜우(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www.hyewoo.com)
가장 빠른 식물의 움직임
식물도 움직일까요? 식물이 움직인다고 하면 우리가 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볼 수 있는 느린 성장 변화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식물 중에 초속 170m 이상, 음속의 절반 빠르기로 움직이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뽕나무인데요. 뽕나무 수꽃이 꽃가루를 방출하는 속도는 식물의 움직임 중 가장 빠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뽕나무는 동그랗게 말린 수술이 가짜 암술 꽃밥 부분에 걸려 있다가 꽃이 성숙하면 꽃밥이 튕겨 나오면서 수술이 펴지는데요, 이때 꽃가루가 무서운 속도로 산포되죠. 이처럼 단 몇 초 안에 일어나는 식물의 빠른 움직임은 흔히 꽃가루나 종자 산포와 같은 번식 과정에서 볼 수 있는데요. 그 외에도 의외의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어떻게 빠르게 움직이는 걸까요?
파리지옥
빠르게 움직이는 식물 하면 이 식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톡 건드리면 잎을 접어 곤충을 잡아먹는 파리지옥입니다. 잎을 접는 속도가 약 0.3초로 매우 빠른데요. 파리지옥 잎의 움직임은 세포의 이온 이동과 삼투압의 영향으로 세포가 부풀거나 줄어들면서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반응이 일어나려면 잎 안쪽 작은 털을 건드려 자극을 주어야 하는데요. 한두 번의 자극만 있으면 일단 잎을 닫습니다. 그다음 곤충과 같은 먹이인지, 아니면 나뭇잎 같은 무생물인지를 구별하는 자극이 일어납니다. 최소 5번 이상 자극을 받아야만 소화가 시작되죠.
잎 가장자리에 눈썹처럼 긴 털은 잎이 닫혔을 때 곤충을 가두는 쇠창살 역할을 합니다. 단 너무 작은 곤충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는데요. 너무 작은 곤충의 경우 소화 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작을 수 있어서 큰 곤충만 잡아먹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이죠. 파리지옥은 최대 10일 정도 곤충을 소화한 후, 다시 잎을 열어 비와 바람에 잔해들을 씻어냅니다. 그리고 다시 곤충들을 유혹하는데, 한 개의 잎은 최대 7번 정도 곤충을 잡아먹는 일을 반복하고 시들어 없어집니다. 이러한 파리지옥의 치밀한 구조와 활동은 곤충 입장에서 보면 살벌하게 느껴지지만 인간에게는 많은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죠.
미모사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 중에도 빠르게 움직이는 식물이 있습니다. 신경초, 잠풀, 함수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식물, 미모사입니다. 이 식물은 사람의 손이 닿으면 움츠러드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만 건드려보면 그 즉각적인 움직임에 다른 잎들도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저는 항상 화분으로만 만나던 미모사를 캄보디아에 식물채집을 가서 야생에서 만났을 때 놀랐습니다. 누군가 화분을 심어 놓은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죠. 아마 항상 키우던 고무나무나 몬스테라를 열대우림에서 거대한 상태로 만난다면 똑같은 기분이 들 겁니다. 잎을 건드려보고 야생에서도 똑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아마 처음 미모사를 발견한 과학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상상했었죠.
실제로 미모사는 과학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미모사를 대상으로 여러 실험이 이뤄졌는데요. 예를 들어 동물 마취제 등 여러 종류의 마취제를 투여하기도 하고, 전기신호를 달리해 잎에 흘려보내기도 했죠. 다소 엉뚱한 것 같지만 실험을 통해 마취제로 미모사가 마취된다는 것을 알아냈고, 또 잎이 닫히는 적절한 전압이 1.3-1.5볼트라는 점을 찾아낼 수 있었죠.
그렇다면 미모사는 왜 움직일까요? 초식동물에게 먹히는 것을 방지하고 해충을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지만 이 모습은 최근 전혀 다른 분야에까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2018년 디스플레이 관련 국제 학회에서 Plant-based Controllable Display, 즉 ‘식물 기반 제어 디스플레이’가 제안되었습니다. 빌딩이나 벽면에 미모사와 같은 움직이는 식물을 심고, 자극을 줌으로써 외벽에 그림이나 글자가 나타나는 효과를 만들자는 것이죠.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 아닐까요.
춤추는 식물
요즘 식물을 친구 삼아 키우는 분들 많은데요. 이 식물이 음악을 듣고 춤까지 출 수 있다면 어떨까요? 콩과에 속하는 코다리오칼릭스 모토리우스(Codariocalyx motorius)라는 식물의 이야깁니다. 음악을 틀어주면 새로 난 작은 잎들이 춤추듯 움직여서 일명 ‘춤추는 식물’로 불리는데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이지만 그 특별한 능력 때문에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죠. 그런데 식물이 긴 시간을 빠르게 움직이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여야 한다면 그건 파리지옥이나 미모사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바로 포식자를 내쫓거나 나비가 알을 낳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비의 모습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춤추는 식물 외에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이 꽤 많습니다. 파리지옥뿐만 아니라 벌레먹이말이나 통발속 식물도 빠르게 움직이는 식충식물이고, 미모사 외에도 여러 콩과 식물들, 괭이밥과의 몇몇 식물들이 잎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물을 통해 인간은 더 많은 상상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순간들
우리는 흔히 식물이 동물보다, 또 우리 인간보다 느리다고 생각합니다. 느긋해 보이는 식물들도 빨라야 할 때는 무척 빠른데 말이죠. 식물들은 그런 때를 알고 있습니다. 스피드를 내야 하는 순간, 기회를 잡아야 하는 순간, 즉 생존을 위해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저하지 않고 움직이죠.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의 순간들, 여러분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