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밀도
“먼지나 공기처럼 부유하는 아름다운 소우주들”
-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작은 우주들>
- 글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은 9편의 에세이로 이뤄져 있다. 「산마르코 카페」에서 시작되는 숨 막힐 듯 아름답고 촘촘한 글은 장렬한 민족주의에 휘말리다 파리떼처럼 무참히 역사의 강으로 휩쓸려 사라지는 이들을 기록하며 마감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저자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거나 혹은 먼지나 공기처럼 이름 없는 대중 사이를 부유하며 문장을 완성한다.
산마르코 카페는 무심한 공기가 지배하고 있어 카페에 드나드는 사람끼리 서로 쑥덕대는 일이 일절 없다. 그래도 인간이 사는 곳은 늘 호기심과 앎의 욕구가 따라붙게 마련. 작가는 윤리적 판단은 배제한 채 이곳 사람들의 작은 우주 같은 삶을 바라본다. 크레파츠 씨는 그 시선에 단단히 붙들린 사람 중 한 명이다. “분명 그는 자기 청년 시절을 후회하고 있진 않다. 아니, 잘 완결 짓진 못했지만 고쳐나갈 수 있는 그림처럼, 이제 그는 바야흐로 그 시절을 다시 다듬고 제대로 손보는 중에 있다.” 무엇을 손본다는 것일까? 그는 여자를 사귄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다가 늘그막에야 제대로 이것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지내는 중이다. 크레파츠 씨의 길디긴 삶에서 작가가 늘그막의 결혼생활을 포착한 것은 연애를 못 해본 것이 얼마나 큰 결핍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산마르코 카페의 단골 벨리코냐 박사도 소우주다. 그는 결혼한 뒤 아내 아닌 여자 두세 명과 놀아났지만 종국엔 그만두었다. 그는 마그리스에게 말한다. ‘다른 여자랑 자네가 침대에 있다면, 잠시 숨 돌릴 참으로 일어나 책을 읽으러 갈 용기조차도 못 내고 말걸? (…)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서 그녀의 어깨와 숨소리만 느끼고 있을 뿐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여자, 그런 여인이 바로 당신 아내 아닌가.’ 다른 여자의 유혹에 여러 번 발이 걸려 넘어졌지만 마침내 아내만이 진짜 여자라고 말하는 그는 일부일처제가 삶의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함께 책 작업을 한 두 작가가 떠오른다. 『붉은 선』의 홍승희 작가는 다자연애를 추구했던 반면, 『정치적 감정』의 마사 누스바움은 일부일처제를 옹호했다. 둘 다 저만의 논리가 있었는데 우리 편집부의 의견 역시 양분됐다. 주로 비혼의 편집자들은 다자연애를, 기혼의 편집자들은 일부일처제를 옹호했다. 복잡한 연애는 사실 사랑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해 성범죄에 연루되는 사건들과는 달리 풍성한 일화와 입장을 만들어내고, 때마침 와인이라도 곁들이고 있다면 사람들은 좀더 너그러운 입장으로 가 줄을 선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모순된 모습까지 기록하는 『죽음이라는 우리의 귀부인』의 작가 보게라도 마그리스의 촉수에 걸려들었다. 보게라는 펜에 잉크를 묻혀 트리에스테 유대인들이 노인이 되고 환자가 되며 마침내 시체가 되는 붕괴 과정을 빠짐없이 서술한 사람이다. 글쓰기는 다시 말해 “밑에 지저분한 것들이 남아 있어도, 솔직한 어조로 자기를 책망하며 그 오류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게끔 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로 마그리스는 모든 ‘성인(聖人)은 작가’라는 등식을 도출해낸다. 성인들은 우리 사이에 있는 개돼지들, 탐욕과 죄악을 메달처럼 걸고 다니는 방탕아들을 너른 마음으로 받아주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결국 작가가 성인이라는 말 같다. 죄 많은 작중인물을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 속에 품어내며 이해하려는 자세, 그 아량, 선악을 따져 묻지 않고 기록하는 행위.
이 책에서 마그리스는 시를 쓰는 이들을 치켜세우지만, 현실에서 시가 갖는 힘이 과장되어 있을 수 있음을, 오히려 현실은 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원함을 피력한다. 가령 스칸델라라는 시인의 선집이 초라하게 출간된 것을 두고 마그리스는 “시가 실제의 삶 앞에서 종종 충분하지 않다는 또 다른 증거”라고 말한다. “세상 모두가 시를 쓰고 싶어하나, 유럽은 시보다 더 건실하고 참된 무언가를 원한다”는 시인 레오파르디의 문장도 중요하게 인용한다. 이는 예술이 때로 현실을 호도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리라. 예술이 전능한 힘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엑스타인스가 쓴 『봄의 제전』에서도 드러나는바, 새로운 예술을 극단으로 추구하던 현대인들의 정신은 1차대전이라는 폭력과 얽혀서 위험한 시대정신으로 구현됐기 때문이다.
『작은 우주들』을 읽다보면 독자는 몇몇 지인과 그들의 세월을 회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읽는 내내 병원 침상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 장례식장에 온 것 같은 느낌, 부모의 재산을 두고 공증인 앞에서 다투는 서먹한 형제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에는 착각하는 삶, 스스로를 속이는 삶도 봄날의 새싹처럼 흔하게 등장하는가 하면, 「발첼리나」에 서술된 마그리스의 가족사는 하나의 민족 서사 같다. 마그리스의 사촌 고조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나폴레옹의 척탄병이었고, 러시아 전선에서 몇 년간 감옥생활을 한 끝에 걸어서 집에 돌아온 인물이다. 몇십 년 지나 늙은 그는 1866년 제3차 독립전쟁에서도 파르티잔 활동을 펼쳤다. 그 외에 술에 절어 추락한 마을 신부 이야기, 계속 뚱뚱해져서 수압관 전문가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한 비만 아내의 삶은 쓸쓸하다 못해 초연하다. 이 책은 그런 삶과 등을 맞대고 그 내밀한 아름다움을 주고받는 것만 같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을 썼다. 그 힘이 반복해서 쓸쓸한 해변의 파도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