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무엇이 식물인가요?
- 글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www.hyewoo.com)
태양을 향해 가만히 서서
식물은 그 모습에서 태양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태양을 향해 곧게 서고, 때론 다른 물체를 잡고 올라가서라도 태양을 추종합니다. 햇빛을 받기 위해 잎을 펼치고 조금이라도 더 햇살을 낚기 위해 잎 모양을 고민해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초록색의 정적인 생명체를 식물이라고 부르는데요. 과연 정확히 식물은 무엇일까요? 식물(植物)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찾아보면 ’식(植)‘은 ‘심다’, ‘세우다’, ‘두다’ 등의 뜻을 가집니다. ‘물(物)’은 ‘물건’, ‘만물’, ‘사물’ 등을 이릅니다. 그럼, 가만히 서 있는 생물이 식물인 걸까요? 기원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는 식물은 움직이지 않고, 동물은 먹이를 잡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으로 식물과 동물을 구분했습니다. 이후 현대 생물 분류의 기초를 만든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도 크게 식물과 동물,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였는데요. 사실 이 식물 그룹에는 곰팡이처럼 식물이 아닌 생물도 포함되어 있었죠.
식물의 조건
식물의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그 모습, 예컨대 광합성, 정적인 모습, 세포벽 등 대표적인 특징에 따라 식물을 정의했는데요. 이런 형태적인 특징으로 식물을 정의하면 이해도 쉽고 간단하게 분류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생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관찰되는 모습보다 생물이 탄생하기까지의 진화과 정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구에는 수많은 생물이 있고 그들의 탄생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른 생물들처럼 식물도 그 진화과정을 추적해 보면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단조로운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계통학적으로는 식물과 가깝지 않은 각각의 광합성 생물들이 살고 있지요.
생물은 크게 고세균, 세균, 진핵생물로 나눠집니다. 고세균과 세균은 작은 DNA를 가지고, 하나의 세포로 된(단세포 성) 단순한 형태의 생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친근한 생물은 대부분 진핵생물이지요. 특히 우리 눈에 보이는 큰 생물들은 다세포성 진핵생물입니다. 물론 진핵생물 중에도 단세포성인 아주 작은 생물들도 있는데요. 크기는 작 아도 진핵생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DNA가 저장된 모습이나 막을 가지는 세포 내 기관들, 세포골격 등 좀 더 체 계화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답니다.
이런 기준을 바탕으로 식물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분명 고세균과 세균이 아닌 다세포성 진핵생물일 것이라고 짐작 하게 될 텐데요.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일부 세균들이 광합성을 하기 때문 인데요. 광합성이 식물의 대표적 특징인 걸 생각하면 이런 광합성세균도 식물이라 불러야 할까요?
엽록체의 기발한 등장
고등학교 생명과학실험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물 DNA 추출 실험에 앞서 학생들에게 DNA는 식물 세포 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았는데요. 모두 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DNA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물질이니, 세포 내에서 하나의 사령탑처럼 핵에만 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러나 DNA는 광합성 기관인 엽록체에도 있습니다. 이렇게 DNA가 엽록체에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엽록체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알 수 있는데 무척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엽록체는 광합성을 하는 세포 내 소기관입니다. 진핵생물의 세포에 존재하고 있지요. 주목할 점은 엽록체를 살펴보면 좀 전에 언급한 광합성세균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핵세포 안에 광합성세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마치 덩치 큰 진핵세포가 광합성세균을 잡아먹다가 소화가 덜 되어 그냥 같이 살기로 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어떤 세포 안에 다른 세포가 들어가 공생하게 되는 걸 ‘세포내공생’이라 부릅니다. 엽록체의 기원에 대해서도 아주 옛날 원시 광합성세균이 원시 진핵세포 안으로 들어가 소화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살게 되었다는 세포내공생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엽록체는 아주 오래전 원시 광합성세균으로 독립된 생물이었을 때 가지고 있던 DNA를 지금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독립된 DNA 외에도 엽록체가 가진 특징들은 광합성세균의 특징과 비슷해 이런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식물이라 부르는 생물
한편, 세포내공생을 통해 엽록체를 얻게 된 진핵세포가 또다시 다른 진핵세포로 들어가 엽록체가 전달되었다는 두 번째 세포내공생설도 있습니다. 지구의 긴 역사와 수많은 생물들, 여기저기서 일어났을 진화적 사건 등을 생각하면 현재 제시된 가설 외에도 온갖 기발한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지금의 생물들이 있기까지 새로운 생물이 출현하고 절멸하길 반복했을 걸 상상해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았겠죠.
생물의 세 그룹 중 진핵생물은 고세균, 세균보다 많은 생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 식물, 곰팡이 외에 친숙하지 않은 다양한 생물도 포함되어 있고 계통도 복잡합니다. 녹색조류처럼 광합성을 하며 물속에 사는 작은 생물도 포함되는 것처럼요. 광합성을 하는 다양한 진핵생물 가운데 육상으로 나와 적응한 생물을 육상식물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식물이라 부르는 건 바로 육상식물인 것이지요.
광합성하는 동물
클랩토플라스티(Kleptoplasty)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광합성을 하는 조류를 먹은 생물이 광합성 능력을 얻는 현상을 말합니다. 광합성 능력이 없는 생물이 조류의 광합성 능력을 훔치는 것과 같죠. 조류를 먹을 때 광합성을 하는 기관인 엽록체는 소화하지 않고 보존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시아 클로로티카(Elysia chlorotica)라는 바다에 사는 민달팽이류가 있습니다. 이 생물은 해조류를 먹고 해조류가 가졌던 엽록체를 태양광발전소처럼 사용합니다. 이렇게 장착된 엽록체는 9-10개월 동안 손상되지 않고 민달팽이의 몸에 남아 광합성을 하며 에너지를 민달팽이에게 전해줍니다. 생김새도 놀라운데요. 엽록체 때문에 온몸이 초록색인 건 물론이고 모양도 나뭇잎 같지요. 곤충 중에도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나뭇잎을 닮은 종이 있는데요. 그렇게 단순히 식물의 형태나 색을 모방한 걸 넘어 이 민달팽이는 광합성을 하기 위한 최적의 형태가 식물이라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 것 같네요.
다른 이를 이해한다는 것
이렇게 다양한 광합성 생물을 살펴보면 간단한 몇 가지 특징으로 식물을 규정짓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서로 다른 사람과 생물들을 대표적 특징으로 빠르게 규정짓고 구분하는 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일 수도 있겠죠. 내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막연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식물도 그리 간단하게 규정되지 않는 것을 보면 서로를 구별 짓기보다는 각각의 생물, 개체, 사람이 가진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참고문헌
Pelletreau, Karen N., et al. "Lipid accumulation during the establishment of kleptoplasty in Elysia chlorotica." PLoS One 9.5 (2014): e97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