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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밀도

산책하는 걸음 하나하나가 시 쓰기
- 한정원, <시와 산책>

  •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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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을 쓴 한정원 작가는 이름이 ‘정원’이어서 식물 애호가인 나는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게 너무 부럽다. 그는 이름만큼 재능 있고 존재가 오롯하다. 다재다능하고 정갈하다. ‘다음에 읽을 책은 당신이 지금 현재 읽고 있는 책에 암시되어 있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시와 산책>을 읽고 나서 나는 다른 책 읽기를 시도해봤으나 몇 페이지 못 가 책장을 덮고, 또 덮었다. 눈처럼 하얀 것은 눈 그대로 두어야지 볕을 끌어다 마구 비추어서 눈석임물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 독자가 때론 ‘계속 읽기에 대한 거부’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읽지 않는 휴지기를 길게 가져야 한다는 걸 이 책은 알게 해준다.

제목에서 보듯 ‘시’와 ‘산책’에 대한 책이지만, 우정, 총합, 과정, 시간, 나 아닌 나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또 벌레, 고양이, 소리,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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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답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역사상 수많은 사람은 길을 나섰다. 거울 속에서 답을 찾는 건 나르시시스트에게나 어울릴 일이므로 나 자신만 마주하는 내 집, 혹은 닮은꼴의 내 가족을 일단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길은 ‘내면’에 있음을 또한 수많은 작가가 간파했듯이, 우리는 너무 많은 풍경으로 사유할 틈을 주지 않는 여행을 떠나기보다 오히려 산책을 택한다. (여행은 겉으로 들뜨게 하고 산책은 속으로 충만하게 해 여행 전문 작가들은 산책하듯 여행을 하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산책하는 걸음 하나하나는 마치 시를 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산책하며 만나는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그녀에게는 산책하며 만나는 담배 아저씨와 과일트럭 아저씨가 기꺼이 시의 한 행이 되어준다.

“진짜 안부가 말줄임표에 숨어 저녁 어스름에 묻혔다.”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시는 어떤 연과 행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라는 말에 나는 더 끌린다. 집 뒤편 논둑길을 걷다가 만나 몇 마디 나눈 열 살의 소녀(“저희 집은 여기 파주가 아니에요. 아빠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엄마가 저를 여기에 맡겨놨어요. 여기선 학교에 못 가요”), 산길을 오르는데 계단마다 낙엽이 수북하니 미끄럼 방지를 위해 발을 빗자루 삼아 쓸던 아저씨, 토요일 편의점 앞에서 로또 복권 숫자를 맞추며 한숨 쉬던 허름한 아저씨. 내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면 그들은 마음으로 되돌려주고, 그것은 오이씨만 한 크기로 심어져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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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정원은 로베르트 발저가 <산책>을 쓰면서 산책자인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 것을 더 좋은 말로 바꿔낸다. “다른 사람에 다른 사람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다만 존재한다.” 과정에 과정을 덧대어 퀼트가 되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그녀는 바느질꾼이 된다. 바느질꾼 하면 누가 떠오르나.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에서 눈썰미 좋았던 바느질꾼 영옥이 맨 먼저 생각난다. 다만 영옥은 한때 관계에서의 바느질이 조금 서툴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음놀림을 재바르고 튼실하게 하지 못했다. 또 떠오르는 건 1960년대 마오쩌둥 시대에 발자크를 읽었던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혹은 평생 파푸아뉴기니의 하겐산 지역을 연구하며 도나 해러웨이에게 SF적으로 사유하기의 단초를 마련해준 실뜨기의 대가 메릴린 스트래선. 스트래선과 해러웨이는 벌레들의 촉수에서 실뜨기의 행위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한정원이 벌레에서 시구를 떠올리는 것과 닮았다.

어려서부터 노인이 된 자기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던 저자는 ‘100세 인생’이 무참하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100년 동안 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100세까지 사는 일부 사람은 죽기 무서워 버티는 것일지 모른다. 죽으면 무(無)밖에 없을까봐.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부재와 없음을 겪지만, 그 무(無)에는 ‘무엇이’ 없다는 뚜렷한 형태의 빈칸이 존재한다. 즉 절대적 무를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죽음은 바로 이 블랙홀 같은 무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다 100세라면 죽는 것만큼 사는 것도 무서울 듯싶다. 나의 닳아빠진 마음을 매일 마주한다는 건 비명을 자아내지 않을까. 영원이 아님에도 길이가 너무 길어 끔찍하다 여겨지는 100년 속에서 “사람은 매일 오늘을 잃고, 영원은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단 하나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잃을 것인가? 어디로 침몰되어갈 것인가? 그녀는 타인 속으로 침몰되어 최대한 겹침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나라는 낯섦에서 빠져나오길 원한다. 내가 불로장생한다는 사실은 끔찍할지 모르나, 타인이 내 시간을 늘여줘 우리가 같은 영원 속에서 산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름답다.

이성에 관심 갖는 것은 몸이 한창 뜨거울 때인 10~30대의 한때다. 열기가 가라앉고 나면 점점 동성에 눈을 뜬다. 남자들이 남자에게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나는 모른다. 반면 여자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눈은 점점 커지고 나날이 몸피를 늘려간다. 저자가 소록도에서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꽤 긴 기간 사람 돌보는 일을 자처했을 때 나는 그 행위에서 ‘여성성’을 본다. 그녀와 내가 같은 여성이어서 다행이고, 그래서 눈이 더 크게 떠진다. 저자가 소록도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 한센병을 앓아 그 섬에서 평생 동안 산 한 할머니는 불행한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체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다> 속 “여자들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 있는가?”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여자들은 죽음 속에서도 노래를 한다. 멀지 않은 날 내게도 불행이 닥친다면 나는 이들 여성과 노래하면서 존엄을 잃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