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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밀도

어떤 몸과 돌이 될 것인가 - 리처드 세넷, 「살과 돌」

  •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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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체가 길고 날씬하며 상체는 풍만해 위풍당당해 보이는 안현진 씨는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나 체력적 우월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근육 외에 살도 많은 그녀의 몸매를 매일 타박했다. “이런 몸으로 살고 싶니?”, “누나 뚱뚱해서 쪽팔리니까 (내) 시합 보러 오지 마.”, “뚱뚱한 게 어울리지도 않게 왜 그러고 나가?” 마지막으로 한 방의 결정타가 날아왔다. “사람들이 무슨 죄야?” 그들은 딸의 몸매 때문에 시각적 매력을 절대시하는 오늘날 타인들의 눈이 더럽혀질까봐 전전긍긍하며 한 사람이 부서지게 했다(이상은 『몸과 옷』, 66100 프레스 참조).

소크라테스 역시 인류가 2,000년 이상 외모 비하를 해온 인물이다. 푹 꺼지고 펑퍼짐한 들창코가 먼저 눈에 띄는데, 그의 두상 조각을 뜯어보니 목도 짧은 데다 쇄골추남이다. 하지만 고전학자 아먼드 단거는 소크라테스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실제와 다른 폄훼였고, 거기엔 악의가 깃들어 있다고 본다. 단거는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얼마나 섹스어필했는가를 여러 자료를 근거 삼아 추적한다. 성적 매력은 아테네 시민의 긍정적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현대 여성과 고대 남성의 육체를 화두로 꺼낸 이유는 기원전부터 오늘날까지 도시(돌)의 역사는 인간의 육체(살)와 핵심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자질을 기르기 위해 다녔던 김나지움은 옷으로 가리지 않고 맨몸으로 다니는 것을 문명의 성취로 여겼고, 접촉도 자유롭게 이뤄졌다. 리처드 세넷의 『살과 돌』은 이처럼 도시설계와 건축을 인간 육체의 경험으로 풀어낸 역사서라 독창성과 지적인 면에서 빛난다. 도시는 신체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유롭게 벗거나 (여성이나 노예에게는) 꽁꽁 싸매도록 권했고, 또 늘 함께 어울리거나 아니면 (가난한 이를) 쳐내면서 자기 영역에 선을 그어 방어해온 장소인 까닭에 신체, 그리고 접촉과 반드시 엮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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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넷이 관찰하는 현대의 도시설계는 접촉의 두려움과 맞물려 있다. 부유한 지역 사람들이 가난한 동네 사람들과 교통이 단절되게끔 구획을 지은 것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40대 여자인 나도 길을 걸을 때 접촉의 두려움을 느낀다. 신체 접촉이 전혀 없어도 아이 콘택트를 하는 순간 나에게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피하는 눈은 지저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남성들이다.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면 다른 칸으로 이동하거나 혹은 하차 후 다음 열차를 탄다. 얼마 전에는 파주 금촌시장 안에 있는 식당에 갔다가 60대 막노동꾼 차림의 남성이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고 나는 마치 범죄 현장에 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아테네의 시민은 낯선 이들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며, 롤랑 바르트가 말한 ‘이미지-목록(image-repertoire)’을 사용한다. 위험인물로 감지되면 분류 능력을 발휘하여 눈을 내리깔고 걸음을 서두를 것!

반대로 일행이 나에게 한 번도 아이 콘택트를 하지 않았던 경멸받은 경험도 있다. 10여 년 전 한 기자와 편집자 3명이 만났는데, 나만 여자였다. 저자이자 기자인 그는 ‘여성들과 일하는 건 달갑잖다.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라며 함께한 3시간 동안 다른 두 남자와만 눈을 맞추거나 대화했다. 눈 맞춤 역시 접촉으로 볼 수 있는데, 도시에서 이런 경험은 남성을 과도하게 경계하고 위험 요소로 여기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된다.

세넷은 돌과 살이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어떻게 관계 맺기를 달리해왔는지 종교와 상업, 사상, 정치와 시민의식의 굵직한 변화 속에서 살피며, 인상적이게도 오늘날과 같이 종교가 쇠락한 시대에도 종교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그것과 도시의 관계를 추적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돌이 살의 접촉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냐를 판가름하며 도시의 도덕성을 판단한다. 즉 육체는 중요하다. 특히 약한 육체는 더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에 강제된 불행한 경험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망 속에서 틔우는 희망의 싹과도 같은 말인데, 『헝거』의 작가 록산 게이가 십대에 집단강간을 당하고 이후 폭식으로 인해 비만의 폐허가 된 몸으로 세상에 강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안현진 씨를 포함해 『몸과 옷』에 나오는 뚱뚱한 여자들은 한 명 한 명 도시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귀한 몸이다. 그것은 시선이 지배하는 도시의 질서를 자신의 패션과 인식으로 균열 내고 도시의 조화를 부조화로 바꾸는 악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잘생긴 시민 남성의 육체에서 도시 탐구를 시작하는 세넷 역시 그늘 속에 있는 여성의 육체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그녀들이 대낮의 세계가 아닌 어둠의 세계를 확장함으로써 도시에 어떤 가능성을 불어넣었는지 그 의미를 규명한다. 우선, 그는 고대 로마에서 비극을 상연할 당시 관객들이 복종적인 ‘여자’의 자세가 되어 비극의 배우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눈여겨본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 육체가 강인함과 완전함이라는 그 이상에서 가장 멀리 추락한, 파토스라는 비정상적 상태에 놓인 것을 보여주며 (…)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자세에서 밑에서 말하는 벌거벗은 목소리를 들었다.” 수그리고 경청하는 ‘여자’의 자세가 ‘공감’으로 직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책 읽는 독자 역시 수동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자세에서 무방비 상태로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중한 시민이다.

한발 더 나아가 ‘피해자=생존자’들의 ‘살’을 보자.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은 폐허가 된 몸으로 도시 광화문 광장에 나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시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마치 씩씩한 사람처럼 이곳에 나오지만, 자신이 친족성폭력 생존자라는 피켓을 30분만 들고 서 있어도 무릎이 저절로 꿇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시위에 한 번 참가했던 최예원 씨는 시위 도중 주저앉아 울었다. 세넷이 주목한 도시의 훼손된 몸들은 인식의 지평이 보통 사람들보다 넓다. 반대로 그들처럼 훼손되지 않은 몸들은 자기 육체를 자부할지 모르나,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의 몸을 잘 읽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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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안정에 대한 욕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이 시대에 이 책은 고대 로마인들 역시 좋은 주거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웃과 담을 쌓고 필지를 최대한 늘리며 정원을 가꿔왔음을 보여준다. 로마에서 집의 기하학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계급, 예속관계, 연령, 재산을 보여주었다. 이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성장으로 인해 질식해가는 도시에 살지언정 청년들은 시골을 택하지 않고 도시의 단칸방에 둥지를 튼다. 경제적 하위계층의 ‘집이 아닌’ 방은 5.18 피해자로 평생 불안증을 앓아온 알코올 중독자 오동찬 씨의 방 풍경과 다를 바 없다. 1980년 5월 전남 화순에서 광주로 다이너마이트를 옮겼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은 오동찬 씨의 방에는 방석과 이불이 구석에 쌓여 있고, 술과 콜라와 약병이 방바닥에 놓여 있다. 그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는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있다. 마치 그는 이 방에서 머잖아 삶을 마감할 것처럼 과거의 트라우마에 붙잡혀 자기 공간을 계속 축소시키고 있다.

나는 최근 서울에 소유하고 있던 소형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았다. 전세를 끼고 보유하고 있던 이 집은 작은 평수에 걸맞지 않은 높은 값에 팔렸는데, MZ세대인 예비 신혼부부는 흔쾌히 값을 치르며 결혼과 동시에 주거 안정을 획득했다. 나 역시 그 돈을 들고서 파주에 정원이 있는 집을 계약하러 부동산으로 얼른 발길을 옮겼다. 도시에서 자주 접촉하게 되는 생존자, 노숙인, 은둔형 외톨이들을 뒤로하고 차가운 영혼이 되어 벽으로 둘러쳐진 집을 사러 돌아다녔다. 나는 다음 질문 중 어떤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첫째, 너는 어디에 속하는가? 둘째,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첫째가 추구하는 것은 ‘분류’이고, 후자가 원하는 것은 ‘연결’이다. 혹시 나는 스치듯 잠깐 ‘연결’하는 가운데 고립감을 살짝 지운 다음, 중세 파리가 부흥하던 시절 사람들이 돌에 투자하려는 욕망을 한껏 키웠듯이 ‘살’보다 ‘돌’ 쪽으로 기운 것은 아닐까. 세넷에 따르면 “육체는 오직 홀로 있을 때 … 차가워지고 둔감해”진다.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서로를 무관심하게 견뎌내는 질서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 타인에 대한 자극과 수용의 수준을 낮춰 타인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다고 세넷이 우려했던 것이 지금 내 살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돌’을 추구하다가 내 ‘살’이 차가워진 후에도 나는 돌담으로 차단한 사각의 공간 안에서 과연 안락함을 계속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때 그리스 비극의 관람자처럼 내 몸을 낮추고 웅크리며 벌거벗게 해줄 것은 무엇인가.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나 한가롭게 읽으면서 은퇴한 노인처럼 대지의 작물을 얻은 뒤 “평화는 확실하고 내 삶은 나빠질 수 없다”고 웅얼거릴 것인가. 내 삶은 어떤 방식으로 취약해져 돌의 둔감함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