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관찰자의 일기
식물이 우리에게 준 결실
- 글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 www.hyewoo.com)
한가득 행복을 안겨주는 석류
겨울 한파가 시작된 요즘 얼어붙는 날씨에 장을 보러 나설 때마다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도 배달보다는 신선한 과일을 직접 사고 싶어 며칠 전 집을 나섰습니다. 생각보다 강한 추위에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후회했지만요. 추위를 뚫고 도착한 저는 평소 잘 사지 않던 석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행복하게 석류를 따 먹던 옛 기억이 나서 석류를 먹으면 이 겨울이 좀 따뜻한 느낌이 들 것 같았죠. 석류는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서 사랑, 풍요, 다산의 상징으로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다산의 의미가 강해 옷의 문양이나 그림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마도 복주머니 같은 모양의 열매에 탐스럽고 많은 씨앗이 들어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많은 맛있는 알맹이는 하나의 열매, 하나의 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과연 풍요롭고 행복한 의미를 가진 열매답지요. 석류를 통해 식물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한 결실, 맛있는 열매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석류가 정말 익었을 때
어릴 때 옆집에 친구가 살았습니다. 친구 할머니도 함께 살고 계셔서 할머니께 송편 빚는 것, 과일을 깨끗하게 씻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친구 집에는 석류나무가 많았는데요. 가을에는 할머니가 잘 익은 석류를 골라 따 주셨는데 저는 그 석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석류가 단단해 쪼개기 힘들고 쪼개다가 알맹이가 다쳐 귀찮은 과일이라고도 하지만 제 기억 속 맛있게 먹던 석류의 모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열매가 완전히 익어 저절로 쫙 갈라지지 않은 석류는 못 따게 하셨지요. 그때 쪼개지지 않은 둥근 석류는 완전히 익은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 이후로는 판매되는 석류가 쪼개지지 않고 둥근 형태라 덜 익었다는 생각에 잘 사 먹지 않았습니다. 추위를 뚫고 사 온 석류를 먹으면서 문득 ‘석류를 사 먹는 사람들은 석류가 나무에서 저절로 쪼개진다는 걸 알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석류는 씨앗을 퍼뜨려 줄 동물이 먹기 쉽게 열매를 절로 열어 보인 거겠죠. 식물이 꽃을 피워 긴긴 시간을 준비한 결실, 열매는 결국 씨앗을 퍼뜨리기 위한 것이니까요.
꽃의 수와 열매의 수
석류를 가만히 살펴보면 나무줄기에 달려있던 열매 자루 부분의 반대쪽이 꽤 복잡한 형태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든 하나의 암술과 수많은 수술이 말라붙어 있는 걸 알 수 있지요. 그 부분에는 원래 도톰한 6개의 꽃받침도 달려있는데 판매되는 석류는 그 꽃받침을 모두 잘라낸 후 판매합니다. 석류나무의 꽃은 아름다워 정원에 심거나 분재로 만들기도 하는데요. 석류꽃을 보면 얇고 주름진 꽃잎에 비해 아주 도톰하고 석류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아래쪽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나중에 석류 열매가 될 부분입니다. 석류는 꽃 모양부터 열매까지 참 독특한 모양입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사과, 배, 복숭아, 포도 같은 과일과는 전혀 다른 모양새죠. 우리가 먹는 과일들은 어떻게 생겨나 우리에게 맛있는 과육을 주는 것일까요? 열매는 크게 참열매와 헛열매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참열매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씨방이 발달하여 된 열매로 복숭아, 토마토, 감 등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꽃받침, 줄기 축 등과 같이 씨방 이외의 기관이 발달하여 된 열매는 헛열매라고 하지요. 석류는 꽃받침이 발달되어 만들어진 헛열매입니다.
열매는 발달 기원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주요 유형으로 구별되기도 합니다. 단과, 취과, 다화과인데요. 단과는 한 꽃에 있는 하나의 암술에서 발달한 열매입니다. 단과는 가장 흔한 형태로 단과 안에서 또 다양한 열매 형태로 나뉘게 됩니다. 그중 우리가 먹는 과일로 익숙한 형태는 아마도 핵과일 것입니다. 핵과는 딱딱한 씨를 다육질이 감싸고 있는 형태로, 복숭아, 살구, 자두, 대추 등이 있습니다. 취과는 한 꽃에 있는 여러 개의 암술로부터 발달한 열매로 딸기와 산딸기가 있지요. 다화과는 암술이 아니라 꽃 자체가 여럿 모여 발달한 열매입니다. 대표적으로 파인애플이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의 어느 부분을 먹고 있을까
알맹이마다 꽤 큰 씨앗이 있는 것도 석류가 먹기 귀찮은 이유지요. 포도나 수박 씨앗을 잘도 삼키는 저도 이상하게 석류 씨앗은 잘 삼키지 못하는데요. 석류가 귤처럼 씨 없이 알맹이가 톡톡 터진다면 먹기에 참 편할 겁니다. 가죽질의 껍질을 까면 많은 알맹이가 나오는 모습에서 석류와 귤의 구조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석류와 귤의 알맹이는 무척 다른 조직에서 발달했습니다. 과육을 가진 일부 다육성 열매들은 몇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가장 안쪽은 내과피, 중간은 중과피, 바깥쪽은 외과피라고 부릅니다. 복숭아 같은 핵과 열매들은 씨앗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부분이 내과피이고 우리가 먹는 부분은 중과피, 껍질이 외과피에 해당하지요. 귤처럼 감귤과의 알맹이들은 껍질에 해당하는 외과피의 안쪽 벽면 털에서 유래하여 과육으로 발달한 것입니다. 석류 알맹이의 과육은 씨앗의 얇은 표피 세포로부터 형성되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의 과육은 생각보다 정말 다양한 부분이 발달하여 만들어진 것이죠.
식물의 결실에 대한 존중
우리가 먹는 맛있는 과일 대부분은 우리가 먹기 좋도록 개량된 것입니다. 씨 없는 바나나, 씨 없는 수박, 씨 없는 귤처럼 슬픈 식물들도 있지요. 그러나 이런 작물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뿐 근본적으로 식물이 열매를 맛있게 만드는 이유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일을 보면서 식물이 꽃부터 시작해 고심하여 내놓은 결실의 과정을 따라가 보면 좋겠습니다.